'좁은 땅덩어리'라는 개념은 애초에 만들어진 강박이다.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 면적을 놓고 보면 세계 모든 국가의 국토 면적 중 85위 정도에 위치시킬 수 있다. 이는 81위에 해당하는 영국이나 73위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와 큰 차이가 없다. 북한을 제외한 한국의 현재 영토만 따져도 포르투갈,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보다 넓다.
'좁은 땅덩어리'라는 개념을 토대로 개발의 정책 기조를 만들기 시작한 건 1970년대. 결국 '박정희'로 귀결되는데, 1977년에 신형식 건설부 장관이 한국경제인연합회에서 “우리 같이 땅덩어리가 좁은 나라에서는 토지의 절대적 사유화란 존재하기 어렵고 주택용 토지, 일반 농민의 농경지를 제외한 토지에 대해 공개념의 도입이 필요하다”며 토지의 공개념을 언급했던 것에서 잘 드러난다. 땅덩어리가 좁다는 어떤 강박은 근대 이전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욕망이나 전근대적 세계관과 연결지을 수 있다고 나는 해석한다. 이는 다시 일본의 제국주의와 피식민의 경험, 북한과의 전쟁을 통한 영토 손실 경험에 닿으며 한국에 토착화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박정희에게 전쟁으로 반토막난 땅이 한국 사회의 재건이나 발전에 있어 가장 커다란 핸디캡으로 인식된 것 같다.
한국의 현대 도시 개발이 박정희 정권에서 본격적으로 가동됐으므로, '좁은 땅덩어리'라는 강박이 거의 모든 정책 방향 설정에 스며들었을 테다. 바로 이 지점에서 토지의 효율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든 정책과 제도를 살피면 이 관습이 얼마나 실질의 관념으로 다뤄졌는지 시각화 할 수 있다. 건축법 자체도 건축보다 토목에 치우쳐진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고 관련 공무원의 수도 건축직보다 토목직 공무원이 훨씬 많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땅과 도시를 다루는 기본적 태도가 건축-건물-공간-문화-가치로 이어지는 시야를 등외하고 토지-토목-효율-자본-가치로 이어지는 시야를 선호함을 의미한다. 도시 개발 일련의 과정을 지휘하는 국가의 공적 관념이 이렇다보니 한국 사회에서 건축물의 특성이나 형식, 역사 등을 맥락으로 인식하고 그로부터 산출할 수 있는 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 1960년대에 지어진 단독주택이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다가구주택으로 변하는 과정이나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다세대 빌라들이 경제적 효율 외의 어떤 건축-문화적 가치도 생산하지 못하고 복제되고 있는 것에는 바로 이런 제도적 기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아파트 공화국'이 된 것 역시 '좁은 땅덩어리'의 개념과 인식이 대전제로 작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제를 통해 구축한 도시의 전경은 공공재로서의 환경을 사유 가능한 환경으로 인식한 상태로 만들어졌는데, 한강 주변의 아파트 단지나 해운대 근처의 고급 아파트 단지 등이 강이나 바다의 풍경을 덮어버리는 형태로 드러난다. 사적 건축물이 공공재인 환경을 막대하게 소비하는 와중에 형성된 인식은 공공재로서의 환경을 인민이 동등하게 나눌 수 없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듯하다. 건축법에서 일조량의 충분한 확보를 철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 역시 같은 틀의 내부에서 다룰 수 있겠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넉넉한 일조량을 확보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도시 개발의 정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매우 의미있는 연구일 테지만, 그런 조사를 선행하는 재개발 혹은 도시재생은 아직까지 전무하다.
공공건축의 경우는 이런 기조를 기반으로 하되, 전체적으로는 전시되어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는 탓에 괴기한 형태로 설계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서울시청이나 성남시청의 신축 청사가 그렇다. 변화를 뚜렷하게 전시하되 시공 비용을 최저 수준으로 유지하는 기준을 두면 건축물이 응당 융해해야 하는 지점들을 완전히 놓치고 만다. 공공 건축물로서의 장소적 특성을 고려한 공간 설계에 충분히 고려돼야 마땅한 인간과 노동과 지역의 네트워크는 전시될 외형을 위해 차치된다. 서울시청 구 청사를 덮은 현대식 유리 구조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따져 밟다 보면, 세종 정부청사의 기괴한 설계와 일맥상통하는 결함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앙에서 시야를 옮겨, 대부분의 주민센터-동사무소가 형식적인 지역 네트워크를 가동시키고 있지만 지역 문화의 기반이 되는 장소로 인식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의 문제, 즉 건축 개념의 부실함에서 기인한다.
기형적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던 한국 사회는 2010년대 구간을 지나며 인구 급락의 미래를 확정지었고, 이는 앞으로의 도시 개발이나 설계에 필연적 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학령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일단 한국의 대학 사회에 엄청난 구조적 조정을 선언하고 있다. 이는 대학가 주변부를 구성하는 도시와 건축물의 형태, 상권의 현 상태에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더불어 북한과의 평화가 확연히 담보되어 향후 양국간 주거 이전의 확실한 자유와 안전이 보장되기 시작하면 도시 개발 담론을 반드시 재구성해야 한다. 190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좁은 땅덩어리'라는 개념이 그릇된 개념이라는 것과 그것이 한국 사회 전체의 풍경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덧붙여 '좁은 땅덩어리'의 개념에 기댄 도시 담론에서 과잉 인구밀도의 탈피는 호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치 현장의 분위기가 인구 감소를 호재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모순도 눈여겨볼 일이다.
박원순이 가지고 있는 도시-사회의 개념과 태도가 위에서 언급한 한국 사회의 어떤 태도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도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박원순의 태도가 곧 한국의 태도라고 본다. 서울시장 박원순이 도시를 바라보는 관점은 그래서 오세훈이나 이명박이 도시를 바라보던 관점에서 단 한 발도 진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대의 시장이나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던 도시 담론과 오차도 없이 포개진다. 이런 담론의 맥락을 꼼꼼히 살피고 박원순의 도시재생이나 공공 건축을 비평하거나 비판해야 마땅한 소위 전문가 혹은 소위 지식인들이 사실상 서울시 혹은 박원순과 공동의 이익을 약속한 상태로 아무런 비판도 비평도 가하지 않는 것은 굉장한 문제다. 이렇게 그릇된 도시 담론이 그 생명을 연장하면, 이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부채는 그간 한국 사회에 쌓였던 것처럼 늘어나 반드시 이듬의 세대에게 상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