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제로

서언 #1

by 워커

친구야, 영화 찍자


2023년 선댄스 영화제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타란티노 감독은, 오늘날 영화 산업이 스트리밍과 프랜차이즈 중심으로 지나치게 상업화되며 예술적 본질을 잃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가 이 영화제 간담회를 통해 영화의 현재를 비관한 것은, 일면 당연해 보인다. 오늘의 영화 산업이 스트리밍 플랫폼에 포위되어, 글자 그대로 거대한 영상물 시장의 초라한 ‘윈도’로 전락한 듯한 모습은 시네필들에게 애처롭게 다가온다. 적어도 극장에서 상영되는 형태의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에게 지금은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중학교 아이들에게 ‘친구야, 영화 찍자’를 부르짖은 것은 2023년부터다. 극장 개봉 영화의 시대가 급전직하 몰락의 길로 들어선 바로 그해가 아니었나 싶다. 코로나19의 여파는 극장을 찾는 이들의 행동 패턴을 바꾸었고, OTT는 이들의 수요를 적절히 파고들었다. 적어도 한국 시장에서 수요가 줄어든 극장 업자들의 타개책은 티켓 가격을 올리는 것이었으니, 돌아보면 관객의 한계 비용을 넘어서는 우매한 결정이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왜 하필 2023년, 극장 영화의 시대가 저물고 제 생명을 불태우던 화려한 석양마저 빛을 잃어 가던 그 무렵이어야 했을까?

그건 아마도, 조금은 본능적인 반항심의 표출이 아니었을까.

그래, 친구들. 극장 영화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는 건 맞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영화’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는 아닐 거야.

설사 극장 영화라는, 인류가 만든 어떤 형태의 제의적 경험이 사라진다 해도, ‘보여지는 스토리로서의 영화’라는 본질은 사라지지 않을 거야.

어쩌면 지금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깊숙한 영화의 기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지도 모르지.

교실에서 발화되지 못한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닿았을지도 모르겠다.

2023년 4월, 중학교 교실에서 ‘친구야, 영화 찍자’를 외쳤을 때, 아이들은 거의 화답하지 않았다. 영화 찍기를 특별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은 예상보다 더 적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사진 찍히는 경험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할 뿐이었다.

‘찍히고 싶지 않다’는 말의 이면에는, 찍혔을 때 너무 쉽게, 너무 자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오용되는 문제가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 문제는 결코 과한 엄살이 아니다.

인스타그램 DM이 가장 중요한 소통 수단인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진과 영상은 자아를 표현하고, 관계를 지탱하며, 세상에 자신을 전시하는 도구이자,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한 순간, 그것은 심장을 관통하는 칼처럼 스스로를 찌르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영상은 어느새 누군가를 공격하고 조롱하는 수단이 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까지 실감 나게 창조하여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오늘의 아이들은 영상이 불러오는 파괴적인 결과를, 전쟁터 같은 관계망의 현실 속에서 체험한 세대다.

아이들은 ‘영화’라는 단어에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는다.

‘영화’라는 말은, 적어도 2023년의 교실과 2024년의 교실에서는 힙한 울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큰둥한 아이들의 ‘찍히기 싫다’는 푸념만이 뇌리에 남았다.

영화가 대체 무엇인지, 지금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이 교실을 배움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무언가 각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무엇을 각오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닻은 올려졌다.


왜, 다시 영화일까


그렇다. 영화는 영화다.

대형 스크린의 12 채널 입체음향이든, 내 손바닥 스마트폰 안의 작은 세상이든, 그것은 여전히 영화다.

감독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따져 묻기 이전에,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대전제가 놓여 있다. 때로는 침팬지만 등장하는 영화도 있고, 먼 우주를 유영하며 ‘푸른 다뉴브강의 왈츠’만 반복하는 영화도 존재하지만, 그것들 또한 대체로 인간의 삶을 구현하는 알레고리로서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2023년, 중학교 교실.

그것도 남자아이들만 모인 교실에서 ‘인간의 삶’, 우리들만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담은 이야기가 과연 추출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것이 영화라는 장르 안에 담길 수 있을까.

거의 직관적으로, 오히려 바로 그런 교실이기에 영화가 필요함을 문득 받아들였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끝없이 탐색해 나가야 하는 평균 14세의 아이들에게, 오늘의 나를, 어쩌면 내일의 나를, 더 근원적으로는 나를 이룬 과거의 순간들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체험은 소중한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나를 직시했을 때 비로소 발견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영화다.

삶의 시간 축 안에서 유력한 사건들을 미분하고, 드라마틱하게 적분해 나가는 영화의 존재 방식이 ‘나’라는 우주를 펼쳐 내는 데 그지없이 효율적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성공한 영화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한때 소나기, 그리고


비가 쏟아지는 우기(雨季)가 머지않아 지나가고, 설사 다시 소나기와 태풍을 만난다 해도, 내가 경영하고, 책임지고, 즐길 수 있는 내 삶의 그날이 온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 어쩌면 그 수는 더 많아지고 있는 추세인지도 모른다.

매년 더 많은 아이가 정신적인 불안정으로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통계가 아니라, 교실 안에서 느껴지는 체감이다.

물론 이 현실은 공식 통계로도 확인된다. 여성가족부의 청소년 통계 보고는 암울해 보인다. 코로나19 이후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 지표는 크게 악화되었다.

2023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 보고서를 기반으로 2018년과 2023년 결과를 비교해 보면, 우울증을 겪는 아이들이 75.8% 증가했고, 불안장애로 치료받는 아이들은 93.1% 늘었다. 자살 생각과 시도 역시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025년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스마트폰 과의존 비율은 42.6%에 달한다.

교실은 자주 뒤집힌다. 벌떡 일어난 아이가 의자를 들어 뒷자리 아이의 머리를 내리친다. 극적인 폭력이 갑자기 벌어진다. 친구들은 놀라고, 교사는 눈을 의심한다.

교실이 요동치고, 학교가 신음하며, 119 응급차량이 운동장에 나타난다. 피해자가 신체적으로 크게 다치지 않고 사건이 마무리된다 해도, 예상하지 못한 폭력에 노출된 것만으로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된다.

이 충격적인 폭력의 에피소드 안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관계성의 맥락이 담겨 있다. 단순히 '미성숙'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현실이 있다. 언어화되지 않은 현실들은 학교의 교문 밖에서는 결코 소명되지 못할 뿐더러 대체로 그 존재마저 부정된다. 아이들도 안다. 폭력은 해결책이 아님을. 그럼에도 사건은 여전히 벌어지고, 사회는 이에 익숙해져 간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교실에서 영화의 존재를 생각해 보고, 우리의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영화 안에 담는 것에 동의했다. 왜 만들어야 하는지,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조금씩 공감해 나갔다. 이 이야기는 그 2년간의 거친 기록이다. 다름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것에 공감해 나간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