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삼인방

서언 #2

by 워커

제1장 영화교육 어젠더 #1

우선, 선재를 소개하자.


선재 같은 인물을 교실에서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수많은 학생이 들고나는 중학교의 한 교실에서, 선재는 둥글둥글한 안경테가 유난히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선한 눈매로, 언제나 어딘가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짓는 얼굴.

중3 학생에게서 느껴지기 어려운 ‘여유’란 것이, 만날 때마다 새롭게 다가온다. 여유롭다. 쫓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만든 여유가 아니다. 주변의 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여유다.

결국 선재는 잊을 수 없는 개성을 지닌, 수업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친구 같은 학생이 되었다. 나에게도 한 방향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수업 친구’가 생기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2010년에 태어난 선재가 1960년대 히피 문화를 대변했던 록 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White Rabbit〉을 무의식 중에 흥얼거릴 때면, 나는 잠시 놀라곤 했다.


– 선재야, 그 노래는 어떻게 알아? 유튜브로?

– 그런가? 기억이 잘... 어떻게 알았지?

– 무슨 뜻인지 알고 부르는 거야?

–... 앨리스와 흰 토끼 얘기 아닐까요?

– 대충 그렇긴 한데... 다른 의미로도 읽히고 있긴 하지.

– 저도 보긴 봤어요. 약물 얘기 말씀이시죠?

– 표면적으로야 전혀 문제 될 만한 가사는 아니긴 하지. 그냥 앨리스와 흰 토끼 얘기니까.

– 하하, 그렇군요.

– 언급되는 약물이 워낙 심각한 종류라... 약물에 대해서만큼은 완전히 단호한 차단이 필요해.

– 맞아요. 그래서 저는 원작자의 의도가 뭐건, 그냥 앨리스와 흰 토끼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흰 토끼를 따라 이상한 세계로 떨어지는 앨리스 얘기만으로도 충분해요.

– 그렇지. 근데 〈White Rabbit〉은 적어도 히피 문화의 정신적인 공기 같은 걸 대변하는 노래이긴 해. 노래도, 가사도. 몽환적인 분위기에 현실의 경계를 넘는 앨리스와 흰 토끼 이야기가 찰떡이기도 하고.

– 루이스 캐럴 역시 썰이 많은 천재잖아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그 자체로 엄청난 수수께끼 같은 얘기고요.


이야기는 루이스 캐럴에 대한 수다로 이어졌다.

양육자님의 취향일까? 유튜브 알고리즘의 영향일까? 태어난 해와 무관하게, 복잡다단한 덕후적 지식과 더불어 문화적인 시야나 정신적인 토양까지도 수십 년, 수백 년을 넘나드는 기묘한 아이들이 있기는 하다. 인생 10회 차 아닌가 싶은. 이쯤 되면 인류의 역사는 개개인의 지적 업적이 DNA를 통해 세대를 더하며 축적되어 가는 시스템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관련 학문 분야만 해도 네 개가 넘는, 제법 복잡한 STEAM 프로젝트를 완성해 왔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장 강력한 공통분모는 ‘세상만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직관이었는지도 모른다.

과학과 공학, 예술과 인문을 경계 없이 넘나드는 교사의 폭넓은 관심사를 선재는 별다른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공유했다. 스스럼없이 ‘죽이 잘 맞았다’.

여기 기록되는 이야기는, 선재와 또 한 명의 친구 수영, 그리고 나, 문제적 삼인방의 끝없는 수다로부터 시작한 영화 수업에 관한 것이다. 그 모든 일은 “재미있는 프로젝트 하나 해보지 않을래?”라는 교사의 즉흥적인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직관적이거나, 철없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려면, 이제 수영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겠다.


내친김에, 수영도 소개하자.


수영은 선재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선재가 봄바람처럼 온화한 융합주의적 공학도의 재질이라면, 수영은 약간의 변형이 가미된 T형 인간에 가깝다. 그 ‘변형’의 핵심은, 그가 의외로 낙천주의자라는 점에 있다.

수영은 사실, 누가 봐도 꽤나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다. 그럼에도 무슨 일이 생겨도 흔들림 없이 웃으며 받아넘긴다. 임계를 넘어서는 감각의 폭풍이 몰아칠 때, 수영은 느슨함을 추구하며 스스로를 잠잠하게 만든다. 아마도 훈련된 자기 통제의 결과일 것이다. 이런 엄정한 자기 통제는 낙천주의자의 느슨한 생활양식이라는 겉모습 뒤로 감춰져 있을 뿐이다. ‘마이 페이스’를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단단한 결기가 보인다.

동시에, 무엇이든 팩트로 확인되지 않았거나 틈새가 보이는 이론이라고 판단하면, 반론과 반례의 가능성을 절대 지나치지 않는다. 그럴 때면, 평소의 느긋한 수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수영의 확인 공세가 시작되는 조짐이 보인다면, 애초 자신의 언설에 ‘틈새가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즉시 후퇴하는 것이 이롭다. 이미 엄청난 질문 폭탄이 점화되어 버린 것이므로.

가령, 선재가 시도 때도 없이 무언가를 툭툭 만들어낼 때, 수영은 우선 밀도 높은 생각에 빠진다. 선재가 광범위한 인문학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나갈 때, 수영은 수학적 해결책을 찾는 데 몰두한다.

일상에서는 이 둘을 직접 비교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렇게 각자의 특성을 풀어내다 보니 그 차이를 들여다보는 일도 제법 흥미롭다.


출항


성장한 뒤 돌아보면 한 살 차이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급격히 자라는 시기인 학교에서는 그 1년의 차이가 꽤 크게 작용한다. 무학년 교실을 선호하는 교사로서, 1학년 꼬꼬마부터 진학을 앞둔 3학년 아이들까지 한 공간에서 함께 공부하게 하는 것에는 명확한 교육적 이점이 있다고 느껴왔다. 교사의 개입 없이도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배움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2의 수영과 중3의 선재가 서로 긴밀한 1:1 인간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두 흥미로운 학생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2년에 걸쳐 교사를 매개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쉼 없이 이어 나갔다. 미디어 아트, 공학, 수학, 교육학이 융합된 STEAM 프로젝트부터, 각자의 관심사를 탐구하는 소논문, 공동의 저작을 출간하는 책 쓰기까지.

이런저런 활동을 함께 하며 두 학생은 자연스럽게 느슨한 팀워크를 이루어 나갔다. 그리고 결국, 철없는 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화의 세계에 발을 담가 보자는 다소 무모해 보이는 합의에 이르렀다.

프로젝트를 결정하고 초기 한 달 동안, 대체로 낙천적인 기대를 안고 건강한 웃음을 터뜨리며 첫 영화 만들기가 순항 중임을 기꺼이 믿었다. 거의 매일 점심시간이면 아이들과 특별실에 모여 20분 동안 궁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 창작 동아리를 모집해 보니 역시 예상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아홉 명의 아이가 모였다. ‘영화’라는 말의 화려한 울림이 조금씩 지워지는 시대, 아이들의 환호성을 들을 수는 없더라도 그런대로 분위기가 잡혀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작가로서 영화를 만드는 것과 교육과정으로서 영화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다. 교육과정은 철저히 메타 인식의 관점에서 설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 만들기 과정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진로와 연계된 전문성을 기르게 되는 것일까?

교육과정을 미리 만들어두기는 했지만, 날이 갈수록 스스로에게 진심을 대해 던진 질문이 되지 못했음이 분명해졌다. 그로부터 길고 복잡한 시행착오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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