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가치에 대한 우리들의 오해

서언 #3

by 워커

궁리


“이제 뭐 해요?”

“뭐 하는 동아리에요?”

“자유시간 줘요.”

“언제부터 자유시간이에요?”


종 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응? 영화 동아리인 줄 모르고 온 거냐’는 말을 입 밖으로 뱉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처지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대체로 숫자를 안배하려는 담임교사의 성화에 밀려 온 학생이거나, 동아리 이름만 보고 특별히 놀기 좋을 것 같다는 판단으로 참여한 학생들임이 분명하다.

다른 프로젝트보다 조금은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선다. 교사들뿐 아니라 동료 학생들에게도 수업 방해자로 원성이 꽤나 자자한 얼굴들이 보인다. 한껏 심란한 표정으로 비틀어 앉아, 만만치 않은 볼륨으로 저마다의 대화에 몰두한 모습이다. 이럴 때 명확한 수업의 목표와 지도가 만들어져 있지 않다면, 곤궁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겠지.


“영화 동아리라는 건 알고 왔죠? 올 한 해 즐겁게 영화를 찍어봅시다. 오늘은 올해의 영화 프로젝트를 어떻게 운영할지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다분히 차분함을 가장한 목소리에, 한바탕 볼멘소리들이 뒤따른다.

“무슨 영화요?”

“나는 찍히는 거 별론데.”

“뭐 하러 찍어요?”


대체로 요즘의 중학교 교실은 과목이 무엇이든, 어떤 과정이든 교실의 부정적인 언어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과정으로 봐도 될 수준이기는 하다.

이런 것들과 싸우자니 수업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하고, 활동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학생 참여 수업이나 에듀테크(Edutech) 수업들의 효용은 분명하다.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으나, 적재적소에서 교사의 개입과 추상화를 도울 수 있는 정리 과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영화 창작 수업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활동 수업인 것도 사실이다.

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영화 창작 교육과정을 설계하면서, 영화는 하나의 매체로 다루었다.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눈이 번쩍 뜰 만큼 기발하고 완성도 높은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아니었다.

극장용 영화 제작에 적합한 카메라, 조명, 음향기기는 사용하지 않았다. 일상성을 최대한 담아내기 위한 작업에는 스마트폰만으로도 충분하다. 스마트폰의 성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었고, 획기적인 AI 지원 덕분에 포스트 프로덕션(Post-production) 편집 도구의 후보정 작업 범위 역시 크게 확장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촬영할지,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인지, 그리고 그 메시지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어떤 장면을 포착할지를 직접 고민하고 선택하는 경험. 이 모든 것이 영화 창작 교육과정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아우성을 주체적인 참여의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의 큰 틀과 흐름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지 외피가 거칠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왜 영화 창작 수업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비단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다. 교사인 나 역시 끊임없이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떠들썩한 머릿속의 여러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궁리 끝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교육적·사회적·시대적 어젠다들을 추출해 보았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다루고자 한다면, 이 수업은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적 담론을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 속에서, ‘나’라는 존재, 내면의 목소리 역시 결국은 하나의 울림일지 모른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올라탄 작은 우주들이 제멋대로 흔들리며 발광하는 모습이, 지금 이 교실 안에 있다.



사회적 가치와 영화 창작 수업


매일, 우리가 알고 있던 ‘사회적 가치’, 유치원에서 배운 삶의 십계명 같은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 가족을 칼로 공격하지 않는다.

- 습관적인 언어폭력으로 반격을 유도하지 않는다.

- 친구에게 하루에 165번의 문자를 보내 불안을 조장하지 않는다.

- 함부로 찍은 사진으로 타인을 위협하지 않는다.

이런 상식들이 매일 부정된다. 적어도 그런 뉴스들이 미디어의 외침을 통해 나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뉴스 유튜버들의 물리적인 외침이 귓가에 생생하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전에는 본 적 없었던 폭력의 발호만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불안은 ‘가치’ 그 자체가 조롱당하는 장면을 마주할 때 더욱 증폭된다.

가치의 층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자. 그 층위와 무관하게, ‘가치를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가 고리타분한 훈장질로 비쳐질 때, 말 그대로 심리적인 아노미(anomie)에 빠져들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선험적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어온 ‘가치’가 그 전제로부터 부정되는 현실을 마주할 때면,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라고 부를 법한 심리적 불안마저 느끼게 된다.

영화가 하나의 매체라면,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어야 할까. 이 교실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굳이 ‘사회적 가치’라는 표현 안에서 찾으려는 이유는, 아마도 이미 눈앞에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싶어서일 것이다.

- 쉬는 시간에 복도를 걷다 갑자기 맨손으로 유리를 깨는 친구가 있다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일까?

- 단톡방에 친구를 굳이 초대한 뒤 편을 만들어 조롱하는 행동은, 나 자신과 그 친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 인스타그램 DM으로 친구의 사진과 욕을 보내는 것은 폭력일까? 폭력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내 친구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이런 문제들은 그저 그 친구만의 문제일까?

- 그 친구가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면, 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 나만 괜찮으면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은 끝없이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결국 ‘사회적 가치’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사회적 가치’를 다루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바로 ‘가치를 지향하는 것의 가치’를 되살리는 일이었다.

‘가치 지향’은 올드하지 않다.

‘정치적 올바름’은 반드시 ‘지루함’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에 대한 고려가 곧 전체주의적 경직성의 용인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영화 창작 교육과정은, 영화라는 매체 안에 사회적 가치를 담아내는 과정을 뜻한다. 동시에 영화 작업이라는 공동체적 창작 활동을 경험하며,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것의 즐거움과 의미를 직접 느끼는 경험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사회적 가치로서의 메시지는 바로 ‘폭력’이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쉽게 행해지는 폭력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되었는지—그 침윤의 계기와 과정을 되짚어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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