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너무 무감감해요. 자기밖에 몰라요. 사람이 오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죠. 인간이 여기 와서 과연 내가 이 난관을 뚫고 갈 수 있나, 자신을 시험하는 거죠, 산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나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죠."
<지현옥. 안나푸르나에서>
안나푸르나 BC(4,095M) 피켈 모양의 추모 이정표
한국 여성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자, 지현옥! 올해는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실종사고 후 22주기가 된다. 매년 4월이 되면 교정 동상 앞에 산사람들이 모인다. 숭고한 산악정신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코로나 영향으로 비대면으로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모험가 정신은 기억 속에 남아있다.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알피니스트였다. 1988년 북미 최고봉 맥킨리(6,194m)를 등정했다. 1993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으로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오른다. 산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다. 중국과 파키스탄 국경의 가셔브럼 1봉(8,068m)과 2봉(8,035m)을 단독 등정한다. 언제나 히말라야를 꿈꾸고 있었다.
1999년 엄홍길 산악인과 함께 안나푸르나에 도전을 한다. 4월 29일,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의 품에 잠들게 된다. 정상 등정 후 하산 중 실종 사고였다. 셰르파와 로프를 묶고 내려오는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7년 가셔브럼 1봉(8,068m) 정상에 선 지현옥 산악인
자연 앞의 인간은 한 없이 작은 존재가 된다. 세계 최고봉과 단독 등반이라는 기록 때문에 기억하지 않는다. 틀을 깬다는 것,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다. 보수적인 산악계에서 여성으로서 많은 갈등을 이겨내야했다. 지금은 히말라야 14좌를 완등 한 여성 산악인을 배출했지만 당시는 선구적인 활동을 했다. 열정만으로 세상에 부딪는것이 힘든 시기였다. 산을 오르며 많이 외로웠음을 생각한다. 지금은 대학 산악부의 명맥이 유지되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시대가 많이 변했고 즐길거리가 넘친다.
새내기로 동아리에 들어가 산을 배웠다. 산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았었다. 힘들고 위험한 산과의 인연은 삶의 큰 방향이 되었다.주말이 되면 배낭을 꾸리고 마냥 산으로 향했다. 깎아지른 바위에서 줄 하나에 의지해 매달린다. 너와 나를 잇는 ‘자일’의 끈이다. 산에서는 ‘형’이라는 호칭으로 하나가 된다. 내가 기억하는 현옥이형은 산악부에서였다.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을 때다. 돌연 대외적인 활동을 접고 후배들과 함께했다.
경험 부족한 후배들과 꿈을 나눴다. 파키스탄 가셔브럼을 등반하기 위해 거리에서 텐트도 판매하고.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산에 갈 수 있었다. 8000m 히말라야는 모험이다. 희박한 공기에 터질 듯한 심장, 숨쉬기조차 힘든 죽음의 지대에 선다는 것. 우리가 산악인들의 도전 정신에 감명을 받고 경외심을 느끼는 이유다. 고산증세와 앞이 보이지 않는 설맹증의 위험한 상황을 무릅쓰고 등정에 성공을 한다.
“아버지! 먼 곳에 가요. 이번에 가면 언제 올지 모르겠어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안나푸르나 등반을 떠나기 전이었다. 아버지 묘소를 방문해 절을 올린다. 그것이 마지막 인사되었다. 군에 있을 때 TV로 사고소식을 접했다. 믿기지 않았다. 현옥형의 등반 다큐 방송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쩌면 산의 부름을 알고 있었을까? 서른아홉 꽃 다운 나이, 히말라야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안나푸르나 꿈을 꾼다. 높은 마루에 올라 대자연의 설산을 가슴에 품는다. 끓는 열정이 그곳으로 향하게 한다. 정상에 오르면 지체할 여유가 없다. 살아서 내려가야 한다. 희뿌연 안갯속으로 몸을 맡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뿐이다. 영혼을 깨우는 바람소리. 안나푸르나가 내게 왔다.
세월은 소리 없이 지나간다. 옛것의 흔적들이 하나둘 지워진다. 산의 기억은 추억 속에 희미해진다. 우리의 마음은 변함이 없기를.
산악부실을 찾았다. 오가는 사람 없는 동아리방은 쾌쾌한 창고처럼 되었다. 캐비닛을 열었다. 먼지 덮인 산행 일지와 사진들이 고스란히 있다. 앨범을 펼친다. 재학생 시절 미국 요세미티 등반 사진이다. 수직의 절벽 허공에 매달려 오른다. ‘아! 어떻게 여길 올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매일 붙어 있던 빨간 벽돌 건물, 강의동 외벽에 홈이 파여 있다. 자일을 설치하고 볼더링(건물 외벽을 오르는 등반)을 했던 곳이다. 벽을 쓰다듬으며 손끝에 전해오는 감촉이 행복하다.
트레킹 전문 여행사에서 근무하며 네팔을 여러 번 다니게 되었다. 네팔 담당자로 카트만두 지사에 상주하기도 했다. 등반가가 아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안내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다. 산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삶이 진행 중이다. 안나푸르나 갈 때마다 현옥형을 생각한다. 잊지 않고 술 한잔 올리고 온다.
몇 해 전 특별한 여행을 꾸렸다. 안나푸르나 추모 트레킹을 계획했다. 히말라야 곳곳에 산에서 죽은 산악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돌탑들이 있다. 암벽등반의 성지 북한산 인수봉에도 벽에 붙은 동판들을 보게 된다. 깊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네팔의 트레킹 적기는 10월 ~ 3월, 건기 시즌에 멋진 히말라야 뷰를 볼 수 있다. 7월 말, 안나푸르나는 우기 시즌으로 비가 많이 내리고 거머리가 출몰한다. 산악부 가족과 중학교 아이들도 참여한 12일간의 트레킹은 내게 가장 의미 있고 마음의 부담이 없었던 여행이었다.
출발 전 이정표를 제작했다. 안나푸르나를 찾는 사람들이 숭고한 등반가 정신을 기억하고 희망을 얻길 소망한다. 피켈(등반 개인 장비) 모양을 한 상징물이다.
카트만두는 뜨거운 여름이다. 매캐한 먼지와 복잡한 거리,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타멜거리에 왔다. 익숙한 동네에 온 기분이다. 네팔 다움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이 생기고 이방인들의 문명이 스며든다. 사람들의 순수는 그대로다. 여행에도 난이도가 있다. 히말라야에서 필요한 여행은 사람과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산악마을에서 사람들의 삶의 여유를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며 문화를 체험한다. 그리고 자연과 동화되는 순간이 온다. 내가 힐링을 얻는 시간이다.
네팔 트레킹의 묘미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동물이다. 무거운 짐을 나르는 포터들의 땀방울에 뭉클한 감동을 느낀다. 야크의 눈망울은 어떤가? 덩치는 산만한 것들이 몰이꾼의 한마디 외침에 놀라서 도망을 간다. 주인이 지나는 사람과 담소라도 나누면 그대로 멈춘다. 다른 사람들이 억지로 길을 재촉해도 꿈쩍 않고 뒤를 흘끔거리며 기다린다. 히말라야의 고요함, 오지일수록 소리는 깊고 아름답다.
경비행기를 타고 아름다운 페와 호수가 있는 휴양도시 포카라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기점이 되는 나야폴까지 이동한다. 산골 마을에도 길이 열렸다. 차가 다닐 만큼 넓혔다. 란드룩 마을까지 이어져 걷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산속 롯지에도 인터넷이 들어온다. 숙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와이파이를 연결하게 된다. 트레킹은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을 하루 6-7시간 10여 킬로 내외 오르내린다. 예보된 날씨가 좋지 않다. 안나푸르나에서 가장 긴 다리 뉴브릿지를 지나면 촘롱까지 계곡 오르막 구간이다. 체력을 안배해야 한다. 협곡을 따라 이동해 시누와에서 머문다.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린다. 하루 종일 우리를 따라오는 개가 있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일행을 안내라고 하듯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혹시. 현옥형이 환생해 마중이라도 나온 걸까?’ 훈련된 개도 아닌데 애정이 간다. 포터들은 제대로 된 우의 없이 비닐을 덮고 무거운 짐을 나른다. 시누와(2,360M)에서 데우랄리(3,150M)까지 모디강을 따라 산행한다. 고도가 높아지며 설산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물고기 꼬리 모양의 신성한 산 마차푸차레(6,993M). 히운출리(6,441M)를 조망한다. 3,000M가 넘는 고소 지대에서는 고산증세를 조심해야 한다.
오색의 타르초가 휘날리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롯지 전경
‘비스타리, 비스타리’ 천천히 움직인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3,720M)를 지나면 마지막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130M)에 도착한다. 다행히 구름이 걷히며 히말라야의 푸르름을 느낄 수 있었다. 트레킹 첫날부터 따라온 개도 도착을 했다. 비를 흠뻑 맞고 몸의 여기저기 피흘림으로 상처가 났다. 배가 고픈지 ‘킁킁’ 대더니 풀을 띁어 먹고 있다. 거머리가 몸에 붙어 흡혈을 하고 있었다. 먹을 것을 주고 거머리를 떼 주었다.
안나푸르나가 가장 잘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추모제를 올리기 위한 준비를 위해서다. 피켈 상징물을 조립하고 이정표의 자리가 될만한 곳을 정했다. 땅을 파고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을 했다. 함께한 스텝들이 모였다. 미리 준비한 음식과 바람의 경전 오색의 타르초에 글을 남겼다. 온 누리에 퍼지는 부처님 말씀처럼 안나푸르나 신께 그리고 현옥형에게 마음이 닿기를 기도했다.
트레킹의 시작부터 베이스캠프까지 일행과 함께 올라온 히말라야 개. 추모 제막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옥형' 이라불렀다.
가수 이성호님이 추모곡을 만들어 주셨다. 고요한 산중에 울려 퍼진다. 가까이 있다는 반가움과 불러도 대답 없는 형의 메아리.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안개구름이 지나간다. 안나푸르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안나푸르나의 이정표가 되어라
<작사. 작곡 이성호>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풍요의 여신은 서른아홉 꽃다운 너를
그렇게 품어 버렸다. 그렇게
지독한 봄바람이 불어 불어 불어
현기증 나도록 숨도 못 쉰 채
옥구슬 같던 너의 목소리
더는 들을 수 없어
간다, 간다. 간다
네가 있는 그곳으로
이젠 안나푸르나의 이정표가 되어라
현옥이형! 알피니즘 정신으로 함께했던 날들. 순간 속에 영원처럼 반짝이던 희열이었습니다. 깊고 푸르던 고독의 속삭임까지. 한발 한발 오르던 길이 눈앞에 선합니다. 만남이 잠깐이듯 헤어짐도 잠깐이겠죠! 시간의 강물은 우리를 늘 낯선 포구에 내려놓습니다. 어디든 산이 있고 아름다운 별들이 총총이 떠오르는 곳이라면 우리는 함께라는 것을 믿습니다. 배낭을 둘러맨 형의 어깨는 늘 당당했습니다. 안나푸르나 품에 편히 잠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