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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정 Sep 28. 2023

첫 대본을 쓰던 날 2탄

눈물의 신고식


막내작가에서 정식 서브작가가 된다는 것은 내가 맡은 코너를 오롯이 내 스스로 준비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배작가들의 업무를 도우며 서포트하던 때와는 달리
해당 코너를 전적으로 맡았으므로 문제가 생기면 작가의 책임이었다.
아이템 준비든, 섭외든, 촬영현장 세팅이든 변수가 생겼을 때 수습해야 하는 것도 작가였다.
막내작가 때도 변수가 생긴 선배작가들의 진행에 차질 없도록 도운 적은 많았지만 서브작가로서 시작하는

첫 주부터 그 변수가 생길 줄이야...

특별한 재주를 가진 사람을 섭외해야 했는데 섭외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OOO 프로그램 윤혜정 작가라고 합니다.
OOO을 직접 만드신다고 하셔서 연락드렸는데요"
"아이고 방송은 이제 안 합니다" (뚝)
"제가 요즘 도무지 시간이 안 돼요"
"별로 찍을 게 없어서 촬영은 어려워요"
이렇게 저렇게 설득해 보았지만 알아보는 아이템마다
섭외대상인 분들에게 거절을 당했다.
이상했다.
평소에 선배작가들 대신 섭외를 종종 할 정도로
큰 무리가 없었는데 왜 섭외과정부터 꼬이는 걸까.
방송은 이제 1주일도 채 안 남았건만 다른 선배작가님들의 아이템은 담당 PD가 촬영 나가 있건만 난 아이템이 정해지지도 않다니 큰일이었다.
희망을 갖고 전화했던 건마저 단호하게 거절당하자
전화를 끊은 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시간은 벌써 늦은 밤이었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 것도 민폐인 시간이었다.
서브작가 첫 주부터 내 코너가 펑크 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잘 해내고 싶은데 왜 시작부터 꼬이는 건지, 내가 부족한 건지,
적응도 못한 첫 주부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내가 지금 신고식을 치르는 중인건지 답답함과 불안함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참을 울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집에 가서 새벽까지 아이템을 찾아본 뒤 다음 날 오전부터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섭외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조건 섭외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대본은 둘째치고 방송준비조차 못한다면 작가로서 자질이 없다는 것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가까스로 섭외에 성공했다.

출연자분에게 간절히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촬영현장에서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될 수 있도록 출연자가 촬영을 진행해야 할 곳들에 연락해 추가 섭외를 하고 일정을 조율했다.

다음은 촬영스케줄과 촬영할 내용들을 작성하는 촬영구성안 차례.

최대한 열심히 작성해서 전달 후 2~3일간의 촬영 뒤 담당 PD의 편집을 기다리며 다음 주 아이템을 준비했다.





이후 1차 편집본을 확인하며 담당 PD와 수정사항을 조율하고 모든 코너 영상의 팀 시사를 했다.
시사 때 받은 여러 선배들의 피드백들을 반영해 수정한 뒤  이제 대망의 대본 작성 시간.
밤을 새우며 대본을 써야 했다.
내레이션 녹음시간은 이른 아침이니
몇 시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서둘러 내레이션 대본을 쓴 뒤 메인작가 선배에게 컨펌받고 수정할 시간도 고려해 본다.
내가 1차 대본에 할애할 수 있는 건 서너 시간 정도였다.
그러면 영상 1분당 대본 작성에 최대 몇 십 분을 소요해야 하는지 계산했다.





빈 편집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자리를 잡았다.
최대한 조용하게 대본에만 몰두해야 했다.
첫 대본이라 수정할 부분이 많을 것이고 내레이션 성우 분이 대기하도록 할 순 없다는 생각에 머릿속 타임워치를 켜고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대본을 쓰면서 실제 성우분들의 어투와 말 속도를 따라 해 보며 이 구간 길이에 대본의 양이 적당한 지 수시로 확인하며 써 내려갔다. 중간중간 현재 시각도 체크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
흡사 노트북 위를 일정 속도로 손가락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타다닥 타닥 타닥 타다다닥.
다행히 계획한 시간 내에 1차 대본을 끝냈다.
메인작가 선배에게 전달했다.
심장이 다시 쫄깃해진다.
대본이 왜 이 모양이냐고 역정을 들으면 어떡하지...
싹 다 다시 쓰라고 하시진 않겠지...
역시나 부족한 점이 많았던 첫 대본을 선배가 여러 군데 수정한다.   
수정 대본을 보며 역시 난 갈 길이 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과 수정 끝에 내레이션 시간을 얼추 맞췄고 녹음실로 메일을 보냈다.
방송 여부가 불투명하게 느껴졌던 당시 나의 첫 아이템은 그렇게 무사히 방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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