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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만의 지도

by 소망이 아빠


나만의 지도를 그린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모험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미 그려진 지도 위의 길을 따라가는 게 안전하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모험이 모험으로 받아들여지는가, 이 명제는 작게는 가정, 크게는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세대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도 위에서도 크고 널찍한 길을 가라고 배우며 자랐다. 뭐 사실 대부분의 내 또래들이 그런 바람을 안고 자랐을 것이다. 그 중 일부는 큰 길 위에서 살게 되고 나머지는 그 주변으로 이어진 작은 길들, 아주 일부는 큰 길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장기간 여행을 떠나 본 일이 있는가? 짧게는 하루, 길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머무는 도시가 바뀌면 지도를 보고 지리를 익히는 것은 습관처럼 익숙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지도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 물론 지리학적 지도는 거의 다 똑같지만 여행자를 위한 길잡이, 그러니까 추천 명소나 맛집, 사진찍는 포인트 등은 여행지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마련이다. 여행 초기엔 최대한 많은 곳에 가려고 노력했었다.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밤이 늦도록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을 짜서 하나라도 더 보려 빨빨대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 주, 문득 내가 뭘 하고 있나 싶다. 지도 위에 그려진 듯 뻔한 삶이 싫어서, 내 길을 가고 싶어서 이 모든 게 시작된 게 아니던가?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온 것도 다 거기서 시작된 건데 또 다시 지도 위에서 나를 찾으려는 자신을 발견해버렸다.


이제 나만의 지도를 그리고 싶어졌다. 큰 길이든 작은 길이든 나만의 길을 지도 위에 그려놓고 싶다. 쿠바의 멋진 도시 트리니다드, 여러 가지로 지쳤던 나는 이곳에서 다시 힘을 얻었다. 오늘은 ‘까사’에서 (Casa, 집이란 뜻으로 쿠바에서는 민박집을 이른다.) 차려준 맛있는 아침을 먹고 느즈막히 길을 나섰는데, 침대에 누워 지난 밤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나오느라 이미 뜨거운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그리고 지금, 트리니다드 도심 종탑에 올라 가장 멋진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순간인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여기저기 덧 대인 붉은 지붕과 진초록의 나무들, 조금만 고개를 들면 병풍처럼 늘어선 산등성이가 파도치고 이에 부서진 하얀 구름이 그 위를 덮고 있다. 적어도 오늘, 트리니다드에서 나는 나만의 지도를 그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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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탑에서 내려다보이는 트리니다드 시가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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