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냥 걷는 것도 좋다. 그냥 걷는 것,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 아닌 그냥 그 길을 걷는 것,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런 시간을 갖기에 참 좋은 도시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를 지나 이 곳에 왔다. 지난 몇 주 간 하루에 몇 십 킬로 씩 걷고, 비바람을 맞고, 텐트에서 잤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런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뜨거운 태양과 빛나는 거리, 가로수가 참 좋다.
식민시대에 이 근방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주도였다는 이 곳은 고풍스런 유럽식 건물이 많다. 여름의 가로수는 울창하고, 항구 쪽에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배들이 화사한 깃발을 휘날리며 쉬고 있다.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한참 걷다가 땀이 조금 난다 싶으면 앉아서 잠시 쉰다. 연휴기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가득하다. 참 평화롭다. 춥지 않은 것만 해도 좋은데 어딜 봐도 눈부시게 빛난다.
*여기서 동쪽으로 몇 블록 걸으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라는 Avenida 9 de Julio가('7월 9일 도로') 나온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심을 세로로 관통하는 메인 도로로 여기서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오벨리스코(Obelisco)가 나온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나는 약 4개월을 중남미에서 보내기로 계획했다. 중간의 세세한 일정은 짜지 않았지만 어쨌든 멕시코에서 시작해 4개월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끝내기로 했고, 여기서 런던으로 OUT하는 비행기표도 일찌감치 예약했었다. 그리고 지난 달, 칠레 산티아고에서 파타고니아 쪽 일정을 짜다가 자칫하면 시간이 빠듯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만도 오래 걸리거니와 그 방대한 자연 앞에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에 가기 위해 거치는 도시들; 푸에르토 몬뜨와 푼타 아레나스에서는 1박만 하고 최대한 빨리 이동했는데 그 덕에 지금 필요 이상으로 여유로워졌다.
결과적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굉장히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엔 강 건너 바로 옆에 있는 우루과이에 다녀올까 생각했었는데 페리 값만 왕복 100 달러가 넘길래 그냥 그럴 돈으로 이 도시를 천천히 즐기기로 했다, 탱고 쇼를 보거나 스페인어 수업을 한 번 더 듣거나 하면서. 암튼 덕분에 요즘 여유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날씨는 뜨겁고 시간은 많으니 하루에 도시 여기저기를 이동하기 보다 한 동네를 구석구석 걸어다니고 있다.
오늘 아침, 지난 다섯 밤을 보낸 Centro 쪽 호스텔에서 나와 조금 더 저렴한 Palermo의 숙소로 옮겼다. Palermo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도심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Centro에서 지하철 노선 D로 연결된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다시 큰 길로 나와 걸었다. 섭씨 30도에 육박하는 습한 날씨에 금세 땀이 나고 뜨거운 공기가 입가에서 훅훅 거린다. 한참 걷다가 한 쪽에서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보니 스프링쿨러 물이 시원하게 뿌려지는 울창한 숲이 있었다. 나는 더위를 피할 요량으로 얼른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Jardín Botánico Carlos Thays라는 ('카를로스 타이즈 수목원') 곳이었다. 도심에 있는 수목원 치고는 꽤 규모가 있었고 구역 별로 다른 주제의 정원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나는 스프링쿨러 덕에 시원한 산책로가 마냥 좋았다. 그늘을 찾아 요리조리 걷다가 벤치에 앉아 쉬다가 하며 뜨거운 오후 한 때를 보냈다.
이번엔 이색적인 서점을 찾아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명소 중 하나인 El Ateneo Grand Splendid 서점, 원래 극장이었던 건물을 개조해 만든 곳이다. 1919년 오픈한 Theatre Grand Splendid는 (Grand Splendid 극장) 이후 경영난으로 여러 명의 손에 넘어갔었다고 한다. 그 중엔 출판사이자 서점인 El Ateneo사도 있었는데 그 덕에 2000년에 서점으로 재탄생하게 됐다고 한다. 훨씬 클 줄 알았는데 서점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약 1,000명이 앉을 수 있었다는 객석은 이제 책장으로 채워져 있고 무대엔 음식과 차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 가득했다.
나는 서점을 좋아한다. 책벌레는 아니었지만 꽂히는 책이 있으면 밤이고 낮이고 붙잡고 읽는 편이었고 글 쓰는 걸 좋아하게 된 이후부터는 혼자 서점을 찾아 휴일을 보낸 적도 종종 있었다. 유한의 공간이지만 다양한 얘기들이 살아 숨쉬니 마치 어디론가 순간이동 할 수 있는 상상 속 장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 이색적인 서점에서는 그런 느낌까지는 받지 못했다. 책 대부분이 스페인어로 되어 있고 몇 안되는 영어책은 자극적인 미국 소설이라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어딘가로 떠나는 특유의 느낌을 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서점에서, 그것도 이색적인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서 참 좋았다. 차분한 공기라던지 종이 냄새, 책을 감싼 비닐의 촉감 같은 서점의 성격들이 편안했다.
거대한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 평일의 분주함은 서울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뜨겁고 습한 날씨에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나 지하철 역을 지날 때면 나도 어딘가 급히 가는 양 덩달아 걸음이 빨라진다. 하지만 주말의 도시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선사한다. 일요일 아침, 호스텔에서 주는 탄수화물 위주의 아침식사를 후딱 해치우고 그 분위기로 몸을 던졌다.
분주했던 거리는 이제 강아지를 산책시키거나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아직 달궈지지 않은 길은 아침 공기로 상쾌하고, 과일가게 아저씨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동넷길은 모두 1차선 도로를 가운데 두고 대칭을 이룬다. 껑충한 연둣빛 가로수와 알록달록 줄지어 선 자동차, 테라스로 가득한 4~5층의 건물이 데칼꼬마니처럼 길 양쪽에 포진해 있다. 아, 이 순간이 참 좋다. 가로수는 하늘거리고, 자동차들은 멈춰있으며, 양쪽 테라스에는 의자에 앉아 길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군데 군데 보인다.
나는 더워지기 전에 San Telmo 시장부터 구경하기로 하고 D호선 지하철을 탔다. San Telmo 지구는 대통령 궁인 'Casa Rosada'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지역인데 매주 일요일이면 각종 생활용품과 옷, 기념품 등을 파는 길거리 시장이 열린다. 정확히는 오전 10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지만 이미 시장은 사람들로(주로 관광객) 가득했다. 나도 긴 길을 따라 걸으며 한동안 시장을 구경했다.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어 짐을 늘릴 수 없는 처지라 뭘 사진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일요일 오전의 한가한 공기가 참 편안했다.
슬슬 또 날이 뜨거워진다. 이번엔 시원한 실내에서 그림을 감상하려고 Bellas Artes 국립 박물관 (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으로 갔다. D호선에서 H호선으로 갈아타 Las Heras 역에서 내리면 되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주일 넘게 있었더니 이제 지리가 낯설지가 않다. 박물관(Museo)이라고 하지만 'Bellas Artes'가 붙으면 사실상 미술관이다. (칠레 산티아고에서도 Bellas Artes 국립 박물관에 갔었다.) 운이 좋게도 다양한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일요일이라 그런건지 원래 그런건지 입장도 무료였다. 언제봐도 반가운 모네와 시슬례, 피사로의 그림부터 로댕 특별전과 아르헨티나 예술가들의 작품까지 전시되고 있었다. 규모가 큰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이제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뜨거운 바깥으로 나왔다.
일요일이라 문 연 데가 별로 없어서 근처 주유소의 휴게소(혹은 편의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된 Mariano Moreno 국립 도서관(Biblioteca Nacional Mariano Moreno)에 와서 글을 끄적이고 있다. 여기는 어제 처음 와봤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어 이 참에 지난 몇 달간 여행하며 쓴 글들을 정리하려고 도서관을 알아보다가 오게 됐는데 너무나 맘에 들었던 것이다. 요즘 시험기간인지 어제 오늘, 주말인데도 젊은 사람들이 많다. 창 밖에는 플라타나 강의 경치가 보이고 실내는 고풍스런 갈색 계통의 가구들이 가득한 멋진 장소, 삼청동 정독 도서관, 거기에서도 3동 3층의 내 자리가 문득 그리워진다.
첫 날 내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 La Boca(보카 지구), 인연이 없는 걸까, 다시 찾은 오늘은 이상하게 컨디션이 안좋다. 오전에 허리가 조금 아프더니 버스에서는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햇빛 때문이려니 했지만 La Boca의 상징 Caminito와 그 주변 거리의 알록달록함에도 큰 감명이 느껴지질 않는다. 한두 바퀴 돌다가 나무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았다. 잠시 몸을 쉬이며 컨디션이 나아지길 바래본다. 한국 식당이라도 가야하는 걸까.
La Boca가 유명한 이유는 이 곳이 탱고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항구에 위치한 탓에 아르헨티나로 넘어 온 이민자들이 가장 먼저 밟았다는 La Boca, 점차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이 여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힘든 이민생활의 애환이 담긴 탱고는 그렇게 탄생했고 지금도 가난한 예술가나 노동자들이 La Boca에 많이 산다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온 첫 날, 내게 안좋은 인상을 준 이유도 이 근처가 비교적 치안이 좋지 않은 위험한 동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관광 명소가 돼버린 Caminito 주변은 예외다.
나는 탱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이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무언가 '살아 숨쉬는' 걸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하지만 관광객을 유혹하는 수많은 기념품 가게와 알록달록 예쁜 건물만 눈에 띌 뿐, 컨디션 때문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쩐지 처음 인사동 쌈지길에 갔던 날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La Boca에 대한 평가는 조만간 다시 와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내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