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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3)_부에노스 아이레스, 생각들

by 소망이 아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첫 날, 개고생으로 시작!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첫 날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알고 보니 우범지역 빈민가에 있었고 그나마도 주소를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가로등도 가게도 거의 없는 컴컴한 La Boca, 동네 양아치들이 다가와 마리화나를 권하고 도움이라도 줄 것처럼 친한척을 하더니 역시나 맥주 값 좀 달란다. 갈고 닦은 수려한 스페인어와 가슴 부풀리기로 상황을 모면했지만 어느새 배낭을 짊어진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결국 숙소는 찾지 못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호스트에게 전화를 했지만 '숙소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고, 경찰은 이 동네는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조언했다. 밤 11시, 지칠대로 지친 나는 악에 받힌 걸음을 걸으며 다시 대로변으로 나왔다. 점심 이후에 아무 것도 못 먹었는데 배고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습한 날씨와 무거운 가방, 음침한 동네 분위기에 한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육두문자가 입 안에 맴돌 쯤 허름한 호텔에서 작은 방을 얻었다. 낡았지만 깨끗한 방은 곧 지친 나의 땀&발냄새로 채워졌다. 곧바로 뜨거운 물로 씻고 빨래까지 한 뒤 침대로 푹 파묻혔다. 문득 무사히 침대에 누워있는게 대단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부에노스의 첫 날은 이름과 다르게 전혀 부에노스(buenos = good)하지 못했다.









여행의 끝이 보일 무렵; 호스텔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9박을 예약했던 호스텔에서 6박만 채우고 나왔다. 1박에 9달러로 아침까지 포함된 저렴한 곳이지만 도저히 더 묵고 싶지가 않아서 다시 숙소를 찾고 짐을 옮기는 수고를 하기로 했다.


어젯밤, 새벽 한 시에 잠에서 깼다. 8인실 도미토리 룸이라 룸메이트가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런대로 견뎌오던 터였는데 (그래서 요 며칠 깊게 자지는 못했는데) 어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몇 차례의 문소리와 이어지는 말소리, 목소리를 낮추려고 하지도 않는 모습에 나는 슬슬 화가 났고 아예 불까지 켜고 이것저것 하는 통에 잠에서 완전히 깨버렸다. 그 때 확인한 시간이 12시 54분, 휴대폰 화면에서 시간을 보고 순간 며칠간 받은 스트레스가 확 올라와버렸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 끄라고 강하게 얘기했다. 스페인어로 현지인에게 화를 내기는 그게 처음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기분이 확 가라앉았고 숙소를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문제의 호스텔! 이 호스텔은 1층을 Bar로 운영하는 곳이라 여기서 숙박하는 사람들이 밤에 맥주를 마시며 놀기 좋은 곳이었다. 다음엔 이런 곳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방, 내 침대, 내 공간, 그리고 우습게 들리겠지만 내 변기... 당연했던 그 작은 것들이 무척 그리운 요즘이다. 나머지 3박을 위해 작은 호텔방을 결제했다. 나 혼자 쓰는 호텔방이라니, 몹시 사치스럽지만 남미의 마지막 며칠은 그런 스트레스 없이 기분 좋게 보내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그래,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남미에 너무 많은 정이 들었다.









14페소짜리 크로와상



요즘은 매일 아침 동네 슈퍼에 들른다. 하나에 7~800원 꼴의 크로와상이나 바나나 같은 걸 조금 사서 가방에 넣는데 그럴 때면 아르헨티나의 높은 물가를 실감한다. 그게 뭐가 비싸냐고 하겠지만 천 몇 백원으로 밥 한 끼 할 수 있는 근처 다른 나라들을 생각하면 아르헨티나는 확실히 '잘'사는 비싼 나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루에도 몇 번씩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나름의 살림을 카트에 싣고 가는 모습들이 종종 보이고, 지하철에는 구걸이나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도 많다. 높다란 아파트가 가득한 도시, 테라스마다 특유의 밝은 햇살이 내리쬐지만 그 그림자도 그만큼 진한 모양이다.

며칠 전, 슈퍼에서 크로와상 몇 개를 사서 나오다가 길 건너에 앉아 있던 노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른 다섯 손가락을 모아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먹을 걸 좀 나눠 달라는 신호를 하며 내가 들고 있는 빵봉지를 애절하게 바라 본다. "Claro, amigo. Pero no tengo mucho." ("네. 근데 많이는 없어요.") 나는 세 개 중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잔뜩 발린 설탕이 녹아 윤기가 자르르한 크로와상, 그는 순식간에 그걸 받아들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발을 옮기며 손에 뭍은 끈적한 설탕을 쪽 빠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14페소 짜리 크로와상을 하나 나누고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화창하다. 지난주까진 습해서 땀이 줄줄 났는데 요 며칠은 마냥 맑고 파랗다. 아침에 산 크로와상과 바나나는 이제 절반 정도 남았다. 가방에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어깨에 앉은 무게가 줄어든다.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주거형태는 대부분 아파트다. 높은 건물이 가득하고, 거리엔 자동차들, 햇살도 따사롭지만 어두운 부분도 있다. 잘산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은 대도시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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