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첫 날 나는 힘이 쭉 빠졌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는 알고 보니 우범지역 빈민가에 있었고 그나마도 주소를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가로등도 가게도 거의 없는 컴컴한 La Boca, 동네 양아치들이 다가와 마리화나를 권하고 도움이라도 줄 것처럼 친한척을 하더니 역시나 맥주 값 좀 달란다. 갈고 닦은 수려한 스페인어와 가슴 부풀리기로 상황을 모면했지만 어느새 배낭을 짊어진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결국 숙소는 찾지 못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호스트에게 전화를 했지만 '숙소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고, 경찰은 이 동네는 위험하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조언했다. 밤 11시, 지칠대로 지친 나는 악에 받힌 걸음을 걸으며 다시 대로변으로 나왔다. 점심 이후에 아무 것도 못 먹었는데 배고픔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습한 날씨와 무거운 가방, 음침한 동네 분위기에 한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육두문자가 입 안에 맴돌 쯤 허름한 호텔에서 작은 방을 얻었다. 낡았지만 깨끗한 방은 곧 지친 나의 땀&발냄새로 채워졌다. 곧바로 뜨거운 물로 씻고 빨래까지 한 뒤 침대로 푹 파묻혔다. 문득 무사히 침대에 누워있는게 대단히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부에노스의 첫 날은 이름과 다르게 전혀 부에노스(buenos = good)하지 못했다.
9박을 예약했던 호스텔에서 6박만 채우고 나왔다. 1박에 9달러로 아침까지 포함된 저렴한 곳이지만 도저히 더 묵고 싶지가 않아서 다시 숙소를 찾고 짐을 옮기는 수고를 하기로 했다.
어젯밤, 새벽 한 시에 잠에서 깼다. 8인실 도미토리 룸이라 룸메이트가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도 몇 번 있었지만 그런대로 견뎌오던 터였는데 (그래서 요 며칠 깊게 자지는 못했는데) 어제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몇 차례의 문소리와 이어지는 말소리, 목소리를 낮추려고 하지도 않는 모습에 나는 슬슬 화가 났고 아예 불까지 켜고 이것저것 하는 통에 잠에서 완전히 깨버렸다. 그 때 확인한 시간이 12시 54분, 휴대폰 화면에서 시간을 보고 순간 며칠간 받은 스트레스가 확 올라와버렸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 끄라고 강하게 얘기했다. 스페인어로 현지인에게 화를 내기는 그게 처음이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 기분이 확 가라앉았고 숙소를 옮기기로 마음 먹었다.
내 방, 내 침대, 내 공간, 그리고 우습게 들리겠지만 내 변기... 당연했던 그 작은 것들이 무척 그리운 요즘이다. 나머지 3박을 위해 작은 호텔방을 결제했다. 나 혼자 쓰는 호텔방이라니, 몹시 사치스럽지만 남미의 마지막 며칠은 그런 스트레스 없이 기분 좋게 보내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그래,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남미에 너무 많은 정이 들었다.
요즘은 매일 아침 동네 슈퍼에 들른다. 하나에 7~800원 꼴의 크로와상이나 바나나 같은 걸 조금 사서 가방에 넣는데 그럴 때면 아르헨티나의 높은 물가를 실감한다. 그게 뭐가 비싸냐고 하겠지만 천 몇 백원으로 밥 한 끼 할 수 있는 근처 다른 나라들을 생각하면 아르헨티나는 확실히 '잘'사는 비싼 나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하루에도 몇 번씩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나름의 살림을 카트에 싣고 가는 모습들이 종종 보이고, 지하철에는 구걸이나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도 많다. 높다란 아파트가 가득한 도시, 테라스마다 특유의 밝은 햇살이 내리쬐지만 그 그림자도 그만큼 진한 모양이다.
며칠 전, 슈퍼에서 크로와상 몇 개를 사서 나오다가 길 건너에 앉아 있던 노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얼른 다섯 손가락을 모아 입 앞으로 가져다 댔다. 먹을 걸 좀 나눠 달라는 신호를 하며 내가 들고 있는 빵봉지를 애절하게 바라 본다. "Claro, amigo. Pero no tengo mucho." ("네. 근데 많이는 없어요.") 나는 세 개 중 하나를 꺼내 건네줬다. 잔뜩 발린 설탕이 녹아 윤기가 자르르한 크로와상, 그는 순식간에 그걸 받아들고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발을 옮기며 손에 뭍은 끈적한 설탕을 쪽 빠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작 14페소 짜리 크로와상을 하나 나누고 많은 생각을 했다.
오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화창하다. 지난주까진 습해서 땀이 줄줄 났는데 요 며칠은 마냥 맑고 파랗다. 아침에 산 크로와상과 바나나는 이제 절반 정도 남았다. 가방에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어깨에 앉은 무게가 줄어든다. 발걸음도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