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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봄 Jan 24. 2024

하찮은 상담심리사의 사적인 일기 _ 세 번째 기록

내가 상담을 시작하게 된 건 part 1

난 작가가 꿈이었다.

정확히는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다.


몇 살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드라마, 영화, 만화를 꿰고 살았다.

책과 티브이를 좋아하는 아빠의 영향이 컸다.

아빠와 함께 다닌 집 앞 대여점의 만화책과 비디오를 반 이상은 봤다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상상하고 이야기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허접하게 손으로 엮어 만든 만화책과 소설책도 여러 개가 있었다.

난 훗날 당연히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되고, 부산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책과 비디오를 대여하는 작은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성적이 나빠 글과는 거리가 먼 전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난 여전히 이야기를 좋아했고, 대여점은 내 아쉬움을 채워주는 좋은 곳이었다.

마치 꿈을 이룬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스물한 살의 가을.

수업 중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거절을 누른 뒤 '수업 중'이라는 문자를 쓰는데 '아빠가 다치셨데. 전화받아봐'라는 엄마의 문자가 먼저 도착했다.

잠시 강의실을 나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 건너편에선 침착하려고 애쓰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많이 다치셔서 부산에 있는 병원으로 이송 중이래.

하나병원이라고 하니까 지금 바로 가 봐. 엄마도 바로 갈게.'

수원에 계시던 엄마는 울산에 계시던 아빠가 이송될  병원에서 가장 가까운 나에게 먼저 연락을 한 듯했다.

당시 우리 가족은 형편이 어려워 뿔뿔이 흩어져 살았었다.

엄마는 수원, 아빠는 울산, 나는 부산 그리고 언니는 대구.

... 이산가족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부산에 있던 난 알고 있었다.

아빠가 이송되고 있다던 하나병원은 화상전문병원이라는 것을.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빠의 회사사람을 만났고 간단히 사고 정황을 들었다. 가스 폭발로 전신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가스와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하는 아빠가 어째서 가스폭발 사고를 당했는지 궁금했지만 난 더 중요한 질문을 해야만 했다.


'생명엔 지장이 없지요?'



회사사람의 침묵에 나도 더 이상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빠의 수술이 끝나기를... 엄마든 언니든 누구라도 빨리 와 주기를...

수술은 엄마가 도착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그리곤 얼굴이 새하얗고, 눈이 큰 의사가 아주 조심스럽게... 너무나 조심스럽고 주저하며 눈물이 고인채 우리에게 말했다.

오늘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미리 작별인사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중환자실에서 들어가니  감은 눈만 빼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사람이 제일 먼저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미라처럼 꽁꽁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막내딸을 위해 해물탕을 손수 끓여주고, 게 살을 일일이 발라주고, 붕어를 직접 잡아와 밤새 고아 몸보신을 시켜주던 내 아빠라는 것을.

금방이라도 일어나 말을 할 것만 같으면서도

의식을 찾으시면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얼른 편해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중한 모습으로 사망선고를 해주던 얼굴이 하얀 그 의사는

우리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었고, 난 그 충분한 시간 동안 숨이 넘어가게 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린 걱정 마 아빠. 사랑해'라는 이 짧은 몇 마디를 겨우 내뱉고 붕대로 감긴 손을 꼭 잡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 촉감이 생생하다.


그렇게 아빠의 숨이 멎은 후 일주일의 시간은

감히 지옥 같았다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시간들이었으며, 나의 오랜 기간 꿈이었던 작가의 꿈을 버리고  상담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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