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여름의 빌라>
당신은, 늘
확신할 수 있는가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은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에요. 풍화된 것들은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지호에게.
독일인 부부와 함께, 이제는 폐허가 된 바욘 사원을 거닐며 당신이 느꼈을 상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당신의 부인 주아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당신의 분노가 사실은 교수로 임용되지 못한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삶에 대한 방어기제가 아닌가 하는 날선 지적도 마음 속에 묻어두었다. 대신에 나는 보다 본질적인 물음을 가하고자 한다.
너무 많은 생각이 인간사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인간의 지혜는 과학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으나, 역사의 국면에서는 늘 파괴로 귀결되었다. 순환하듯이 말이다. 당신이 서있던 앙코르톰의 바욘 사원은 발전과 파괴로 순환하는 역사의 굴레가 사실은 '관성'이라 온몸으로 주장하는 듯 하다. 역사의 진보에 대한 진리에 가까운 믿음은 다른 개체가 아닌 오히려 인간이 수세기에 걸쳐 대항해왔다.
그러므로 사유도 절대적이지 않다. 사유가 진보한다면 파시즘과 우생학이 종말하지 않고 현대사회에 대두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에 앞서, 플라톤과 칸트를 넘어서는 철학자를 현대사회는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역사적 교훈'이니, '교육'이니 하는 것은 자격의 문제가 될 수 없다. 당신이 안다고 확언하는 것은 절대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의무가 있다면, *'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보호하는 것'일 테다.
따라서 이 소설이 지적하듯, 삶과 행복에 대한 담론 역시 물음의 형태로 제시되어야 한다. 당신은 '다크 투어리즘'의 이면을 날카롭게 지적했다고 자신하며 교수적 사명감을 되새겼겠지만, 전범국의 책임으로부터 빗겨서있다고 해서 교훈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삶이 존재하므로 그들의 다양한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당사자를 벗어난 무수한 당위적 해석은 기만일 뿐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타인의 생명과 삶을 존중하지 않는다. 마치 당신이 주아와 한스 부부가 나누었을 우정을 고려하지 않고 그렇게 날선 말을 내뱉었던 것 처럼말이다. 그러니 이 모든 논쟁은 허무하다.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안다하더라도 앎에 필적할만큼 타인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신형철의 뉘앙스]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보호하기, 경향신문, 2021-8-9
-백수린, <여름의 빌라>, 문학동네(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