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일기
당신이 주신,
아름다운 순간들
책장에 쌓여 자리를 차지하는 한 해의 일기는 늘 거슬렸고 불편했다. 그러나 이 젊음의 순간들이 다시 오지 않을 ‘찰나’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 후로는 종이에 꾹꾹 눌러써 하루를 보관했다. 이 글도 그 깨달음과, 하루를 잃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연장선이리라. 오늘 하루가 내 삶의 점이라면 선은 무엇일지 생각해 왔다. 내게 있어, 무수한 점을 이은 하나의 ‘선’은 나의 것이 아니다. 출발의 모양과 관계없이 아름다운 끝이 정해져 있는 선, 때로 거부하고 피할지라도 그 완연한 계획성에 늘 무릎을 꿇게 된다.
20대의 끝을 향해가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럴 때마다 의식하는 차원을 넘어 생각의 집을 지어왔던 재료들을 찾아 나선다. 나를 알지 못하면 애써 쌓아 온 경쟁력도, 삶의 장면 속 따뜻함도 동굴 안을 배회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붙잡은 재료는 ‘기억’이고, 올해 교회에서 고등부 부담임을 맡으며 기억의 실마리를 찾았다. 내 삶의 근간을 이루고 생각과 감정을 추동해 왔던 것은 교회학교에서의 어린 시절, 아주 따뜻하고 포근한, 몇 번이고 돌아가고 싶은 추억이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곁을 채우고 넘칠 정도의 친구들이 어린 시절 교회에 있었다. 끝없이 주어도 더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시던 집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목사님이 계셨다. 이별은 ‘당연했던’ 순간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해 주었다. 커가며 여러 부침이 있었고 시간이 흐른 뒤 교사로서 교회학교 아이들 앞에 섰을 때, 내가 늘 되찾고 싶었던 장면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실감했다. 나는 교회에 흐르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문화, 당신이 허락한 작은 천국을 희구해 왔던 것이다. 여러분은 알까.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러분들 곁의 어른들이 늘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를, 여러분이 교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나온 이 순간들이 언젠가 사무치도록 그리우리란 것을.
캠프는 예술과 음식의 도시 ‘통영’을 향했다. 400km를 달려온 도시는 누군가의 고향이었고, 이제는 우리의 해방일지다. 파스텔 톤의 마을과, 경계 없이 하늘에 맞닿은 바다는 아름다웠다. 현실 너머의 꿈과 지난 추억들이 파도처럼 가슴에 너울거리자 생각했다. 우리는 지난한 세상에 눈을 두고 미로 속을 헤매듯 더듬어가며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삶에 지친 사람들이 바다를 향하듯 우리는 한결같이 당신을 찾아온다. 모두가 파고(波高)에 겁먹지 않고 당신을 믿고 파도에 올라설 수 있기를 기도하며, 우리가 지나쳐온 실수들을 여러분들은 답습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기를, 상처 뒤에 새 잎 같은 살이 돋아나기를 바랄 뿐이다.
캠프 내내 먹고, 또 먹었다. 언젠가 내가 꿈꿨던 교사는 말도 잘하고 탄복할만한 식견을 갖춘 모습이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나의 아름다운 추억의 대부분은 좋은 곳에서 먹고 이야기 나눴던 희미한 기억, 혹은 그날의 분위기로 채워져 있다. 내게 추억을 만들어줬던 이들처럼, 나도 여러분의 추억 끝에 이름조치 희미한 교사로, 분위기로, 감정으로 남기를 소망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다짐한다. 감정은 섬세한 기억에 우선한다. 거창하지만 이 깨달음으로부터 사도 요한을 떠올린다.
이러한 생각에 이르자 둘째 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는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을 떠올렸다. 사진의 채색을 지우고, 다소 진중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나의 침묵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니 수용소에 갇힌 그들의 사연은 철창을 넘지 못한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곳에서는 공산포로의 본국 송환을 저지하기 위한 협박과 고문이, 생존을 위한 저항이 상존했다. 끔찍한 잔혹성과 비극이, 전쟁을 일으킨 인간의 모순을 비웃듯 제네바협약을 비껴갔다. 역사는 그 자체로 역사이나, 한 꺼풀 벗겨내 삶의 곁에 두어야 의미를 이룰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도 그저 박제된 글처럼 방치하지 않고 ‘삶’이라는 채색을 입혀야 할 것이다.
스카이라인 루지, 레크레이션 그리고 두 날밤을 새게 한 아이들과의 소통은 무척 즐거웠다. 나는 때로 타인에게 ‘진지한’ 사람으로 분류되고는 하는데, 이런 즐거운 한때를 아는 자라고 늘 변명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정제된 언어로 글을 써가며 또다시 진지하게 주목하고 싶은 것은 구원의 ‘기쁨’에 대해서다. 니체는 “웃음이 동반되지 않은 진리는 참된 진리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진리를 안다고 말하며 홀로 진지하게, 고고하게 서있는 이가 있다면 그가 말하는 진리는 참되지 않다는 뜻이다. 눈앞의 문제에 천착하거나 유대인처럼 말씀을 율법으로만 대하지는 않았는지, 내 삶에는 진정 구원의 기쁨이 있는지 자문해본다.
교회가 주는 추억은 넘실거리는 물결이나 춤과 같다.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보석함을 꺼내듯,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당신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 자세는 때로는 분명 진중해야겠지만, 과도한 진지함은 오만이 될 수 있다. 당신을 알기에, 우리는 승리로 귀결될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스치듯 지나간 지난 2박 3일간의 캠프를 통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흐르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교사로서의 다짐에 대하여, 삶의 태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통영 중앙시장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수원은혜교회 2023 청소년 1부 비전트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