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킹덤 오브 헤븐』
영화 <킹덤오브헤븐>은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과, 다양한 관점들을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규모와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았던 극장판이 혹평을 받았음에도 감독판의 등장으로 세간의 평가가 뒤집어졌던 까닭은 극장 필름이 원본을 담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방대하고 첨예한 역사 배경이 짧은 러닝타임에 다 담길 리가 만무하니.
극장판에서는 부자연스러웠던 서사구조의 진행도 감독판에서 더욱 매끄럽고 탄탄하게 이어진다. 그럼에도 신앙 이면의 ‘사람’이라는 가치를 들여다보는 주제의식은 극장판과 감독판 모두 선명하게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끝없이 생각에 잠기게 되는 영화다.
물적 고증은 훌륭하다. 하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구성을 위해서일지, 당시 시대상에는 맞지 않는 급진적인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고 느낀다. 가치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감독이 택한 방법이었을까. 이러한 전제를 두고 함께 다뤄본다. 리뷰는 극장판을 기반으로, 서사의 공백은 감독판으로 풀어가 보고자 한다.
인간의 욕망,
사람의 가치의 상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프랑스의 대장장, ‘발리안’. 그의 아내는 전쟁 중에 아이를 유산했고 이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하고 만다. 신앙이 모든 것의 기준이던 시대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내의 존재는 그에게 큰 고통으로 남는다.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도 목을 잘린 채여야 하는 현실은 함께한 생(生)의 부정이다.
아벨린의 영주 ‘고프리’는 숨겨진 자신의 아들 발리안을 찾아오고, 발리안은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리고 기사단에 합류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는 죽은 아내를 모욕한 신부를 죽이고 만다. 신부는 발리안의 이복형제이며, 신앙을 무기로 그를 몰아세우고 형수의 유품을 가로채는 등의 패역을 저질렀기에 살인의 정당성이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발리안은 살인한 자신의 죄와 아내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사단에 합류하게 된다. 이는 신앙이 정신의 절대적인 중심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고프리의 형은 동생의 영주 직위를 아들이 잇게 하기 위해 발리안을 제거하려 한다. 이를 막아내던 고프리는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서 죽게 된다. 이렇게 그의 기사 직위를 이어받게 된 발리안은 단신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당시의 예루살렘은 역사적인 기로에 놓여있었다. 국왕 보드앵 4세는 나병 환자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그를 둘러싼 세력들은 신앙을 빙자해 잇속을 챙기는 상인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영원한 ‘성지’이며, 유대인과 무슬림 공동에게 수복의 대상이다. 11C 말부터 200년간 이어져 온 십자군 운동은 이를 설명한다. 당연히 무지하고 가난했던 평민들과 군인들은 그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참전한다. 아스러져 가는 백성의 삶은 역사의 비루한 진실일 수도,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발리안은 맹목적인 신앙과 명분에 파리 목숨처럼 사라져 가는 사람들을 걱정한다. 바로 이 지점이 앞서 언급한 이유로, 영화의 최대 난제이다.
예루살렘은 모두를 환영한다. 그게 유익해서가 아니라, 그게 옳은 거니까.
보드앵 4세는 그런 그를 신뢰하며 길을 제시한다.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보호해달라”라는 그의 부탁은 ‘사람’이라는 가치를 잃지 않은 선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몸 상태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으니, 기 드 뤼지냥을 필두로 한 한 성전 기사단의 존재는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협한다.
정식 기사가 된 이후 발리안은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용맹한 전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보드앵 4세의 누이동생 ‘시빌라 공주’에 이끌려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는 기 드 뤼지냥과 정략결혼을 한 상태로, 묶여있는 몸이다. 이에 보드앵 4세와 티베리아스는 발리안에게 기 드 뤼지냥을 제거하고 시빌라와 재혼함으로써 왕위를 이을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발리안은 양심을 이유로 이를 거부한다.
영화는 발리안의 양심에 관대한 듯 보인다. 결과론적으로, 발리안이 행동으로 옮겼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의를 충족한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기 드 뤼지냥을 제거하고 발리안이 왕위에 올랐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가 걱정했던 수많은 목숨들도 영어의 몸이 되거나 죽지 않았겠지. 신앙의 신성함과 절대성을 이유로 들자 하니, 아내의 사후를 위해 참전했음을 볼 때 그에게 신앙은 수단이다. 그렇다고 그가 용맹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니, 인물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보드앵 4세는 나병으로 죽게 된다. 그리고 이어 후계로 지목 보드앵 5세는 왕위를 이어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나병 진단을 받는다. 그는 시빌라 공주가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외삼촌과 같은 끔찍한 고통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오라버니의 고통을 지켜봐왔던 시빌라 공주는 아들을 안락사 시키고 왕위를 기 드 뤼지냥에게 양도한다.
왕위를 잡은 기 드 뤼지냥은 곧바로 살라딘을 공격한다. 가시적인 열세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며 학살에 군대를 동원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패하게 되며 발리안은 예루살렘 성에서 살라딘의 대군을 맞선다. 극도로 적은 수의 사람들, 강요된 신앙의 틈에서 발리안은 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이 돌무더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성을 수호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이 전쟁의 목적이 성지를 지키기 위해 죽어나갔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구원을 볼모로 잡아 신앙으로 모든 것을 자행했던 세태에 대한 일갈을 가한다. 발리안은 천민들을 포함해 기동 가능한 성 내의 사람들 모두를 ‘기사’로 임명시키며 공성전에 대비한다. 그리고 그는, 처절한 전투의 끝에 ‘살라딘’과의 협상을 이끌어 낸다. 발리안의 단호한 자세와, 종교를 초월한 살라딘의 넓은 아량은 협상을 성공으로 이끈다.
전쟁의 참상과 생명에 대한 살라딘의 포용성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그 간극에 놀라며, 발리안은 이렇게 묻는다.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라고. 그리고 살라딘은 이렇게 대답한다.
모든 것일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Everything Or Nothing.
영화가 개봉될 당시,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단연 영화는 살얼음판 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가 초기 서부극과 같이 본국을 옹호하는 선전이나 유흥에 다름없었다면 아마 영화의 반향은 냉전 상태와 같았을 것이다. 다행히 영화는 그저 ‘사람의 가치’를 다룬다. 누군가는 구원을 위해, 또 누군가는 부와 명예를 갈망하며 전쟁을 마주한다. 그러나 타인의 바람들로 쌓인 재단에 만인의 목숨이 담보로 잡힌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해진다.
종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영원히 소중할 무엇이다. 그러나 종교 뒤에 놓인 사람에 대해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며 일으켰던 그것, 십자가를 짊어졌던 ‘그’에 대해, 그리고 그가 지켰던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람은 지킬만한 존재인 것이라고.
기억하게. 어떤 게임을 누구와 하든, 영혼만큼은 자네 것이야. 게임의 맞수가 왕이던 권력자이든 말일세. 하나님 앞에 서면 변명이 소용없어. ‘누가 시켜서 했다.’거나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건 안 통하지. 명심하게.
누군가의 욕망이 인간의 잔혹함을 허락했고, 두려움이 많았던 무지한 사람들은 죽음을 내놓아야 했다. 이 또한 그들의 주체적인 선택이라 반박할 수도 있겠다. 마찬가지로 그 선택이 시대와 권력에 의해 학습된 것이라고, 스스로를 의심해 볼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고 항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영화가 주장한 대로, 한 사람이 가치 있는 존재인 까닭은 그에게 각자의 세계를 쌓아갈 선택과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신념에 압도되는 것도, 누군가의 철학에 몸과 마음이 잠식되는 것도 본인의 책임과 그에 대한 결과이다. 고전적인 배경에 급진적인 사상이 어긋나도록 배치한 감독의 의도는 눈 감을 수 있다.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를 단 두 시간의 이항대립을 통해 표현하기엔 더 없는 설정이었다. 인간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에 고결하다. 배타적인, 불가침적인 인격을 생득권적으로 지녔기에 지켜야 한다.
공성전을 앞두고 발리안은 천민들을 기사로 임명한다. 그는 이들이 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동정하지도, 신앙 앞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당연한 존재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전쟁의 목적과 성격을 바로 규정하며 한 명의 기사로서의 몫을 해낼 것을 ‘선택하게’ 한다. 주교는 이를 신성모독이라 반박하며 소리치지만,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신성은 떠받들 당위성을 잃는 법. 이처럼 모든 것은 모든 것일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만의 삶을 선택하는 이에게 삶은 언제나 무엇이 되어 의미를 갖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