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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Sep 07. 2023

구원은 어디에

지옥만세(2023)

지옥만세(Hail to Hell, 2023)

구밀복검의 영화

 오우정 감독의 영화 <지옥만세>는 지옥을 상회하는 현실의 잔혹함과 이를 마주한 10대 소녀들의 여정에 대해서 그렸다. 단편이 큰 사건들 위주로 구성되었기에 서사는 다소 삐걱대며 극적으로 흐른다. 그러나 여정의 이면에는 기어이 한 사람을 지옥에 빠트리는 시스템과 구조에 대한 비판의식이 보여 ‘구밀복검(口蜜腹劍)’과 같은 형식의 변주가 존재한다. 첨예한 대립의 정점에서, 우리는 지옥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우정’이라는 희망을 보게 된다.


 물론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몫이다. 그도 아니면 아예 천국을 꿈꾸지 않던가, 혹은 어느 지점에서 질문을 멈출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어쨌든 영화는 우리에게 현실을 이겨낼 무엇을 선택하기를 조장하기에 우리는 생각을 강요당하게 된다. 당신은 당신의 철학대로 삶을 영위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린’처럼 구원과 같은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삶을 수단화할 것인지, ‘선우’처럼 냉정하게 상황을 재단하며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든지, 그도 아니면 ‘나미’처럼 갈팡질팡하더라도 자신의 방법을 찾아 나설 것인지 말이다.


‘낙원’과 현실 사이

 극으로 돌아와, 나미와 선우는 자신들을 왕따 시키고 가해했던 채린을 찾아 서울에 간다. SNS에서 비친 채린의 성공적인 서울생활은 둘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살을 생각했던 둘에게 유학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되려 삶에 대한 의지를 자극한다. 그러나 나미와 선우가 서울에 와서 마주한 채린은 회개를 갈구하는 연약한 신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허름한 교회에서 꽤 진실된 표정으로 ‘낙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때 채린의 친구였던 나미는 그녀의 회개에 점차 동화되지만, 매 순간 그녀에게 철저히 배척당했던 선우는 줄곧 채린을 날카롭게 관찰한다. 선우의 시선에 채린은 여전히 ‘여왕벌’의 모습을 벗지 못했다. 채린의 구원인 낙원은 상점에 따라 정해지고, 그녀는 이 경쟁에서 선두를 다투고 있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위를 움직여 경쟁자를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말이다. 편한 변명이지만 이는 스스로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생존방식‘의 일환이다.


경쟁의 이면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시스템과 구조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경쟁’으로 수렴된다. 따라서 영화 내에서 우정과 경쟁은 완전한 대립항이 된다. 나미와 선우를 지옥에 내몰았던 구조도, 너무도 평범한 이들을 극성의 사이비 신도로 몰아세운 기제도 모두 경쟁에 있다. 친구나 종교와 같이 ‘유사가족’들을 표방했던 공동체는 경쟁으로 인해 곪아가고 무너지고 만다.

 

 나미의 경우 너무도 강한 어머니의 성정으로 인해 가족은 불안한 공동체로 묘사된다. 어머니와 대립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지만 나미의 내면에는 어머니의 강함에 대한 동경이 있다. 선우의 경우도 장애인 동생에게만 관대한 아버지와 초점을 잃은 어머니의 눈은 가족이 의지할 바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채린은 종교로 인해 가족은 붕괴되었으므로 그들의 구원은 ‘유사 가족’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극에 달할수록 위험을 거듭하고, 기어이 그 위험을 이겨낸 세 소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유사가족은 붕괴되었으며 수없이 감내해야 했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더’ 살게 하고 ‘버티게’ 하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긍정할 수만은 없다. 삶이 죽음보다 그리 나은 선택지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대증요법일 뿐 저들에게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이 시사하는 바는 도리어 기성세대에 대한 원죄와 그들의 속죄의식이다. 경쟁이라는 사회 메커니즘을 공고히 만든 이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된 카르텔에 잠식되어 ‘강함’을 미덕으로 자식들에게 학습시켰던 이들까지도. 모두가 죄인이다. 따라서 영화는 구조에 대한 고발과 비판을 넘어선, 감독의 자기반성적 사유이기도 하다.


목적으로서의 종교, 수단으로써의 종교

 한편으로 영화는 종교인들의 소회를 이끌어내기에도 충분하다. 사이비 종교가 기승하는 사회 현상에 대해 뿌리’ 격인 기독교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리 무리는 아니다. 극 중 채린은 낙원에 이르기 위해 삶의 모든 것들을 수단화한다. 일진으로서 남들을 괴롭혔던 과거의 죄도 회개를 통해 상점으로 승화하는 것이 그녀의 본 목적일 것이다. 그녀에게 종교는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삶을 재건할 가장 확실한 수단인 것이다. 그렇게 종교라는 수단은 그녀에게 달라진 모습을 요구했으며 이를 충실히 연기했을 뿐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나미가 아닌 선우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기성 종교인들이 불편함을 느꼈다면, 자신들의 신성함 기저에 깔린 기복심리가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불안한 내 삶을 반전시킬 수단으로 종교를 택해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물론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에 나는 채린을 참아줄 용의가 다분하다. 오히려 그녀가 지나치게 과장된 언행과 빈틈없는 속죄의식을 보여줬다면 다른 종류의 위화감을 느꼈을 것 같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선우를 대하는 방법을 잊은 듯 한 어색함은 어느 정도 그녀가 죄를 뉘우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거시적으로 볼 때 종교로 인해 가족과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는 점에서 채린은 <밀양>의 신애와 공통적이다. 그러나 신애가 상대했던 신이 그녀에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고통을 승화하라”라는 목적의식을 주었던 실재적 존재라면, 채린의 신은 탐욕적인 인간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점은 다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 실재와 허상이 이렇게 나뉨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채린에게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피해자 연합’ 친구들이 있었다. 반면 신애의 고통은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찰나를 버티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정의 가치는 충분하다.


찰나를 버티게 해주는 우정

 이렇듯 목적으로서의 종교의 길은 너무도 험난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를 수단으로 전락시키며 채린과 같이 ‘부적’처럼 종교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채린에게 과연 낙원, 곧 구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우정이라 답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채린에게 삶의 망막을 걷어낼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우정일 테니까. 어쩌면 감독은 구원과 같은 극적인 의미와 현실의 삶 사이에 우정을 놓으며 둘 사이의 괴리감을 좁히고자 한 것 같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찰나를 버티게 하는 것만으로도 우정의 가치는 충분하다”라고 하니까. 어쩌면 신애에게도 진정한 우정이 허락되었다면 그것이 단단한 기반이 되어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평안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잠시 뿐이었지만 나미와 선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두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되 힘들고 지친 삶일 것이다. 그 교차점에서 우정이 허락된다면 이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는 고된 여정의 구원일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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