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연락에 놀랍게도 나는 흔들렸다. 결국 K를 만나기로 한 날, 나는 K 대신 그놈을 만나러 갔다.
그렇게 뜨뜻미지근한 재회로 우리는 6개월간의 뜨뜻미지근한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그릇을 억지로 다시 이어 붙여 놔 봐야, 너덜너덜 볼품없어진 그릇이 절대 이전의 아름다웠던 그릇으로 돌아올 리 없다는 교훈.
깨달음을 얻은 나의 통보로 그제야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이별을 맞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정말 맞았다.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는 게 아니라, 벌어진 상처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아물 듯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었다. 흩날리는 벚꽃만 얼굴에 스쳐도 금세 눈시울을 붉히던 내가, 떨어지는 낙엽이 발에 차여도 아무렇지 않아 질 만큼 그렇게 이별의 상처가 아물 때쯤, 왜 불현듯 K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약간은 억울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나마 마음이 어느 정도 통하는 상대가 생겼다고 생각했을 때 느닷없이 날아온 문자 한 통 때문에 어쩌면 인연일지도 모를 사람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인연은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했다. 내가 손을 뻗어 이 인연의 끈을 잡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식한 용기가 자라난 나는 K에게 연락을 했다.
“자니?” 는 아니었지만, 비슷하게 진부하고 구질구질한 안부인사를 건네고는 그냥 휴대폰을 뒤집어버렸다. 답이 안 올까 봐 두려웠고, 답이 온다면 어떤 답이 돌아올지 그것 또한 두려웠다.
1시간쯤 지나서였을까, K에게서 답장이 왔다.
“당연히 기억하지, 잘 지냈어? 그래 한 번 보자, 그때 못 먹은 밥도 먹고.”
생각했던 것보다 꽤나 살뜰한 반응에 고맙기도 하면서 미안한 마음까지 뒤섞여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금요일 저녁, 우리는 종각에서 만났다. 밥 대신 와인 바에서 가볍게 와인 한 잔을 마셨다. 익어가는 가을밤, 적당히 숙성된 와인 한 잔에 우리의 분위기도 한층 더 깊어졌다.
그날 우리에게 틀에 박힌 형식적 질문과 호응은 없었다. 마치 십수 년 전 알고 지냈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서로의 근황을 묻고,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각자의 취향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진짜대화”였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근처 루프탑 바에 나란히 앉아 수제맥주 두 잔을 시켜놓고 한층 더 깊어진 진짜대화를 이어나갔다. 야외에 앉아 있기에는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은은하게 달아오른 취기를 달래기에 적당했다.
“그래서, 도대체 그날은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장난스럽게 묻는 K의 질문에는 약간의 핀잔이 섞여있었다. 그래, 서운할 법도 했다. 뒤늦은 연락에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사실 입장 바꿔 생각했을 때 나였다면, ‘미친놈이네, 이거.’ 하며 연락처를 차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흔쾌히 만남에 응해준 K에게 그날 사건의 경위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어느 소개팅 어플 회사에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개팅을 할 때에 절대로 꺼내지 말아야 할 금기어 2위가 ‘전 애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 금기를 깬 자, 바로 나다.
한술 더 떠서 그날 K를 만나러 가지 않은 이유는 전 애인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고, 전 애인과 처음에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리고 그 두 번째 이별은 어째서 맞게 된 건지에 미주알고주알 하나부터 열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K에게는 내가 정말 최악의 소개팅 상대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K와는 정말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솔직해져야 한다고 판단해서 풀어놓은 이야기들이었다. 그것이 이 만남에 응해준 K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K를 그저 하루이틀 만나고 말 단순한 소개팅 상대로만 여겼다면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연락을 받고 황당하고 기분 나빴을 법도 한데, 흔쾌히 만나자고 해줘서 정말 미안하기도 하고 또 그만큼 고마웠어. 비록, 전에 메시지 몇 번 주고받은 게 전부이긴 하지만 우리가 꽤 잘 통한다고 느꼈거든. 그래서 그냥 내 생각에, 너와 내가 정말 인연일 수도 있는데, 그걸 놓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용기 내서 연락했던 거야.”
하고 싶었던 말, 어쩌면 고백처럼 들렸을지도 모를 말들을 쏟아내고 K의 눈치를 살폈다. 마주 보고 앉아있는 게 아니라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던 나는 곁눈질로 K의 표정을 살폈다. K는 맥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말없이 정면만을 응시했다. 기분 상했나. 초조해진 나는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괜히 얘기했나. 역시 금기를 깨는 건 무리였나.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고, 침묵을 견뎌보려 눈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인연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대로 두었다면 평범하기라도 했을 인연을 악연으로 만들어버린 건 아닌가, 후회가 밀려왔다. 기나긴 침묵 속에서 깜빡깜빡 고요히 명멸하는 종로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눈치도 없이.
“신기하네.“
한참만에 입을 뗀 K는 웃고 있었다, 다행히. 뭐가 신기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웃고 있으니 안심이었다.
“뭐가 신기해?”
“인연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건가 싶어서. 나도 전 여자친구랑 비슷한 이유로 헤어졌거든.”
침묵 속에서 그는 지난 이별을 떠올렸던 걸까, 그것은 결국 인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황당스러울만치 갑작스레 나타난 내가 어쩌면 인연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를 바랐다.
“내일 주말인데 뭐 해? “
나도 모르게 씰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서둘러 감추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짖었다. 만세.
”내일 딱히 계획은 없는데. “
격앙된 목소리를 애써 억누르며 무심한 듯 대답했지만 잔뜩 상기된 표정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럼 내일 영화 보러 갈래?”
“좋아.”
새로운 인연을 찾아낸 서로를 위해 축하라도 하듯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꿀꺽꿀꺽 남은 맥주 한 방울까지 모조리 털어마신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크’하고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웃었다.
둘만의 소박한 축제 속에서 반짝이는 종로의 야경을 바라보는 내 심장도 덩달아 반짝반짝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