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내 뒤로 왔다. 대충 내용은 알지만 독서장 과제 때문에 <플란다스의 개>를 읽었다고. 네로가 너무 안타까웠다면서 “엄마,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가서 네로에게 내 48색 색연필 세트를 주고 싶었어. 그랬으면 석필만으로 그림을 그린 것보다 더 잘 그렸을 거고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하던 설거지를 빨리 마무리하는 것도 급하지만 지금은 설거지를 멈춰야 했다. 고무장갑을 벗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리은이 마음이 참 예쁘네. 그런 생각도 하고” 안아주며 아이 얼굴을 살피니 눈물이 글썽거린 듯했다.
매번 집안일하며 아이 이야기를 건성으로 들었는데 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끝내지 못한 설거지를 그냥 두고 이야기를 들어주자 아이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줄줄 읊었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리은아, 엄마 네로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루벤스의 그림 본 적 있어”
“우와 언제?”
2008년 혼자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마침 벨기에에서 포닥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벨기에도 이틀 머물렀다. 친구가 어디 가고 싶은데 있냐고 해서 ‘나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어’라고 말하고 둘이 안트베르펜으로 떠났다.
벨기에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가면 있는 도시 안트베르펜, 역 주변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옛 건물들과 모던한 디자인의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보석가게가 즐비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세계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이 가장 많이 거래되는 도시가 안트베르펜이라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때라 다이아몬드를 사볼까 계산기를 두드려보기도 했다. 유로가 1700원대, 파운드는 2000원이 넘는 시기임에도 한국보다 다이아몬드가 쌌다.
트램을 탔던가, 걸었던가 해서 안트베르펜 대성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성모승천 그림을 보았다. 실제 존재했던 인물이 아니었음에도, 성당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 아래 파트라슈와 꼭 끌어안고 조용히 눈을 감은 그 이야기가 오롯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반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그림을 보았다.
아이가 나보다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많이 가 보았지만, 나만 가본 곳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서, 그리고 그것이 책 속에 나오는 성스럽도록 따뜻한 곳이어서, 저녁을 먹고 책 이야기와 관련된 경험을 도란도란 나눌 수 있어서 소박한 안락함이 느껴졌다.
네로가 물감을 살 돈이 없다는 것은 생각나는데 석필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기억이 안 났다. 그런 내용도 기억이 안 나지만 '책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색연필을 주고 싶었다'는 생각은 나로서는 책을 읽은 그 시절에도 그리고 지금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마음이었다.
고종석의 책 중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이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세상의 경계에서 처음 건네는,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까 싶은 순수한 결정체 같은 말들이 있다. 그런 고귀한 첫마디들을 모아 <세상에 처음 건네는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을 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