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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Dec 17. 2020

슈톨렌, 그 설레는 단어 하나

Stollen in December

12월의 시작과 함께 이곳에는 첫눈이 새하얗게 내렸는데,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눈도 꽤 많이 내렸다.

프라하에도 아직이라는 첫눈인데, 옛 성이 자리 잡고 있는 고지대라 그런지 이른 눈이 내렸고 이제는 가을처럼 가는 계절을 질질 끌며 다시 되돌아볼 수 없는 겨울이다.

길고도 차가운 잿빛 체코의 겨울이 이제 시작된 것이다.


창밖으로 작은 마을이 온통 차가운 눈으로 덮인 모습을 바라보며 '슈톨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유명한 과자점에 미리 예약을 해서 사 먹을 정도로 서울에서 한창 유행이었던 슈톨렌인데, 그 단어가 주는 이국적이고도 따뜻한 느낌이 언제나 좋았다.

창밖의 하얀 눈을 보니 빵 위를 하얗게 뒤덮은 슈가파우더와의 연상작용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맞아 슈톨렌을 사야 해.



독일식 크리스마스 빵 슈톨렌 Stollen

독일에서는 11월 중순부터 이 돌멩이 같은 슈톨렌 빵을 만들어 두고 일요일마다 한 조각씩 잘라먹으면서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고 한다. 빵의 모양은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누워있던 모습을 흉내 냈다고도 한다.


내가 슈톨렌에 부여한 의미가 조금 불순하긴 했지만 예약을 해서 일 년에 한 번 어렵게 먹었던 슈톨렌은 가격도 비싸서 예수의 강림을 고대하며 조금씩 잘라먹었다기보다는 아까워서 와인 안주용으로 아주 얇게 썰어 아껴 먹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강림절은 나에게 큰 의미는 없는 날이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 달 내내 만끽하기에 이 만한 '기분 소비 아이템'도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인 유럽답게 대형마트 진열대에는 크리스마스에 먹고 즐길 음식과 술, 디저트들로 넘쳐났다.

대형 카트에 술과 고기로 가득 채우고서 온 가족이 즐길 크리스마스 디저트 코너 앞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노부부를 보니 또 한 번 '이 사람들 정말 진심이구나'싶더라.


크리스마스 전 주부터 연말 지나 새해까지 회사들은 셧다운에 들어가고 카페와 식당도 문을 닫으니, 온 가족이 밤새도록 먹고 마시는 긴 겨울 방학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음식과 술을 쟁여 놓는 일은 중요하다.





마트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집어온 삼립 슈톨렌이라니.

이름이 '슈톨렌'이라는 것 빼고는 볼품이 없고 투박하기가 그지없는 독일빵.




빵이 좀 푸석해 보이긴 해도 건과(건포도)와 오렌지 필과 마지팬이 충실하게 들어있는 독일 삼립 슈톨렌이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뭐든 기본보다 잘하는 한국사람들이 만든 슈톨렌이 역시 맛있긴 해.

아몬드 오일과 설탕에 절은 마지팬과 럼주 향이 가득한 빵 한 조각 먹어보니, 마! 이것이 본토의 맛이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슈톨렌이었다.


맛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본토의 맛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매일 조금씩 야금야금 잘라먹고 있는 슈톨렌.

이제 보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왜 빵을 조금씩 잘라먹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기다리는 마음, 그의 강림을 매일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빵을 잘라 와인을 마시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의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프라하, 드레스덴, 브로츠와프, 비엔나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마치 도장깨기 하듯이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는 화려하고도 진귀한 유럽 풍경에 취해, 길에서 파는 기름에 튀긴 음식과 뜨거운 크리스마스 펀치에 취해 즐긴 시즌이었다면 올해는 좋으나 싫으나 집에서 조용히 홀로 즐기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예정이다.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다.





눈이 내린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다.

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지만 방안은 어둑어둑해 하루 종일 스탠드를 켜 두고 슈톨렌 한 조각을 자른다.

그리고 오늘은 데운 와인에 향신료 티백을 넣어서 간단하게 한 잔 만든 글뤼바인을 음료로 준비한다.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오니, 이제는 분위기를 안주삼아 함께 먹는다.


https://youtu.be/Pm3EKkWe440?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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