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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Dec 10. 2020

너와 나, 누군가의 기억에 담길 첫눈

행복은 언제나 작은 마음으로부터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주위가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이 느낌.

눈이다. 첫눈이 온 것이다.

예보가 있어서 첫눈을 기대를 하며 잠자리에 들긴 했지만, 밤새 눈이 내려 쌓인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받는 바로 이 느낌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양쪽 눈 끝에 붙은 더러운 딱지를 대충 떼어내고, 오늘을 담을 카메라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위한 50 코루나 짜리 동전 하나를 외투 양쪽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신발을 신고 모자를 챙기면서 설레는 작은 마음도 작게 접어 안쪽 주머니에 쑤셔 넣고 오늘의 산책길에 나섰다.

아직도 눈이 많이 내린다.



새하얗게 첫눈이 내린 산책로에는 보통의 날보다 더 이르게 산책자들이 길을 나선 것 같다.

눈이 내린 아침엔 모두가 같은 마음이겠지, 아무도 밟지 않은 산책로에 내 발자국을 내고 싶은 설레는 마음.


모닝커피도 한 잔 없이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작은 공원에서 처음 만난 것은 엄마, 아빠, 그리고 말괄량이임에 틀림없을 시바견으로 구성된 한 가족이다.

남자와 여자는 아마도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쓸 나뭇가지를 잔뜩 주워 눈을 털어 말리는 중이었고, 강아지는 차가운 눈 바닥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며 '기분 째짐'을 마음껏 발산했다.

디즈니 만화의 장면처럼 네발로 통통 튀어 다니는 것을 보니 누가 봐도 어지간히도 신이 난 것 같다.


개들도 꿈을 자주 꾼다고 하던데, 오늘의 기억이 그의 꿈에 찾아가서 자면서도 좋아서 네발을 허공에 동동~ 굴러댈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사진으로 담으면서도 내 프레임 속의 풍경이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




매일 걷는 이 산책길도 오늘은 정말 달라 보인다.

매일 걷는 이 길 위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풍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 내가 주머니에 구겨 넣고 온 설레는 작은 마음이 어제의 것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리라.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위해 동전을 준비해 나왔는데, 정녕 눈 오는 이 아침에 문을 열지 않았다고?!

오늘의 실패라면 뜨겁고 맛없는 커피를 사지 못한 것.



누군가의 기억에 영원히 남겨질 첫눈 오는 날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형제는 아침에 일어나 밤 사이에 윈터 원더랜드로 변한 창문 밖을 보고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아직 침대에서 꿀잠을 자고 있는 엄마와 아빠를 흔들어 댔겠지.


엄마를 꼬시기에는 아마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수면양말을 신은 채, 흰 눈이 아직도 함박 하게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면서 뜨거운 차나 한 잔 마시고 싶었을 것이다. 추워- 나가고 싶진 않아.

아이들 성화에도 자꾸만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남편의 등짝을 밀어 올려 아이들 옷을 단단히 입혀주고 그 집 남자 셋의 등을 밀어 집 밖으로 쫒았으리라.

'아주 실컷- 놀다가 와도 돼'





아이들이 야무지게 만들어 놓은 3단짜리 눈사람.

쌓인 눈 때문에 아이들이 만화처럼 깔깔 웃어대는 소리는 작은 공원 속에서 공명처럼 울려 퍼졌다.

방금 큰 아이가 낸 웃음소리와 작은 아이의 조잘대는 소리가 돌림노래처럼 서로 겹쳐서 공원을 가득 메우는 순간. 내가 접어가지고 나온 작은 마음이 밖으로 나오면서 크게 쫘악 펴지는 것을 느꼈다.

아, 행복이다. 이게 행복의 모양이었어.


어릴 적 큰 눈이 왔던 날, 동생과 장갑이 다 젖어서 손이 아플 정도로 눈사람을 만들면서 놀았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좋아하던 사람과 함께 코트 어깨가 하얗게 되도록 눈을 맞으며 걷던 길도 어렴풋이 그 느낌이 남아 있지만, 기억 속에 남은 행복이란 대게 이런 것들이다.

그리 특별하지 않았던 작은 날들이 계절의 한가운데에 분포되어 있던 그때.


아이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오늘, 나의 가슴속 어딘가에도 '그리운 겨울 풍경'으로 조그맣게 담길 2020년 락다운 속의 첫눈.


아이들에게 커다랗게 눈을 뭉쳐서 던지던 남자가 '이제 그만 집으로 가자'라는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아서 나도 커피가 마시고 싶어 져 그만 집으로 돌아오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오렌지 껍질과 마지판이 든 '독일 삼립 슈톨렌'

돌아오는 길에 첫눈 기분에 취해 슈톨렌을 샀다.

12월의 시작과 함께 첫눈이 내렸으니 공식적으로 이제 빼박 겨울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고 겨울엔 이것을 먹어줘야지.


서울에서는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낸다며 유명 베이커리에서 정말 비싸고 맛있는 슈톨렌을 사서 먹었었는데, 정작 유럽에 오니 슈톨렌은 마트에서 삼립호빵처럼 파는 빵, 그저 크리스마스 빵이었다.

영~ 맛이 없는 것은 아닌데 빵이 공장에서 찍어 낸 것처럼 푸석푸석한 것이... 역시 맛있는 것에 진심인 한국사람들의 그 집요한 마음이 떠올라 눈물이 찔끔 난다.


빵의 맛을 한층 부각하는 커피보다는 '맛없음'을 잊게 해 줄 와인을 한 잔 준비해야겠다.

맛보다는 오늘의 기억과 함께 분위기를 먹을 것이다.


https://youtu.be/RXALyyBz1bc?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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