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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Dec 03. 2020

지금 이 계절과 함께 살아가기

I am in the fall

이곳에서 매일 계절과 함께 시간이 가는 것을 느끼면서 지내는 요즘, 서울에서의 나의 생활을 되돌아보면 계절의 변화 같은 것은 나의 일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별을 보면서 집을 나서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던 날들 속에서 꽃이 피고 낙엽이 지는 변화를 알아채기란 그리 쉽지 않다.

꽃이 어느새 이렇게 만개했지?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면 봄이 이미 지나는 길이었고, 바싹 마른 가벼운 나뭇잎들이 바닥을 향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그건 내게 속해있는 계절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나는 늘 화가 좀 나 있었다.

사무실에서 오전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먼 곳에 두고 오기 위해 마음에 화가 가득 찬 극지방의 이누이트족 사람들이 한다는 것처럼 점심시간이 되면 나는 걷기를 시작했다.

회사에서 편도 20분 거리에 있던 사찰까지 무작정 걸어서 내속의 화를 꺼내 거기 산 어딘가에 묻고 돌아오면, 내가 또다시 누군가에게 화를 입힐 수 있는 미움, 원망, 분노 같은 감정이 어느 정도는 사그라들어 남은 오후 시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나 혼자 화를 다스리는 가장 좋고 안전한 방식이 바로 점심시간에 가지는 산책이었다.




프리덱 산책로

이곳 사람들에게 산책은 곧 일상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맑은 날이 많지 않고, 어쩌다 햇살이 좋은 날이어도 4시면 해가지는 이곳의 겨울은 오후의 작은 빛을 마음껏 누려야 할 의무가 이곳 사람들에게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자그마한 행복을 찾기 마련이다.

나도 오늘의 작은 행복과 소량의 비타민D를 누리기 위해 해가 가장 좋은 시간에 산책로로 나선다.


산책로에서 매일 만나게 되는 커다란 나무는 봄이 되면 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몽우리를 맺으며, 여름엔 우산 모양의 화려한 마로니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꼭 밤 같이 생긴 'Horse Chestnut' 열매를 맺는다.

혹독한 겨울 동안엔 꼭대기에 겨우살이만 남겨두고 꼭 죽은 것처럼 지내는 나무이다.

산책로에서 볼만한 것은 많지 않고 이 커다란 나무가 전부인데, 매번 다른 그의 모습에 감탄하는 나를 본다.





프리덱 광장 빵집 - 매일 신선한 베이커리
프리덱 광장 디저트 카페 '베이크앤컵'

산책로 시작점에 있는 디저트 카페에 들러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달콤한 과자 한 조각을 사서 걷기를 시작한다.

산책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아이를 데리고 나와 걷거나, 개와 함께 걷는데 나는 커피를 들고 혼자 걸으며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하는데 주로 개나 아이들에게 눈길로 추파를 던지곤 한다.


그리고 가끔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며 '이곳이 주는 바로 이 고요함을 사랑했어'라고 먼 훗날 떠올려 볼 오늘의 기분을 함축하는 단어를 더듬어 본다.




코로나 락다운의 시대,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따뜻한 햇살과 따뜻한 아인슈패너 한 잔, 그리고 달콤한 애플 시나몬 파이 한 조각이다.


따뜻한 햇살에 비타민을 흡수하면 기분이 말랑해지는지 나는 좋아하는 노래의 멜로디가 떠올라 흥얼거려본다.

It's not every day we're gonna be the same way

There must be a change somehow

There are bad times and good times, too

네가 무엇을 하든 조그만 신념을 가져, 좋은 가삿말이다.




좁은 산책로 맞은편에서 나이 든 검은 개와 미간을 잔뜩 찌푸린 할아버지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가 아픈지 걷는 모습이 조금 이상한 개가 나의 다리 가까이에서 코를 킁킁거리며 나를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이놈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 모양이에요, 할아버지!


"도브리덴-" 마스크 속에서 샤이한 목소리로 필터링되어 나간 나의 인사에

"허허"하고 헤파필터에 걸러진 작은 웃음소리로 나의 소심한 인사에 답을 해주었다.




산책길에 사 온 오늘의 행복 한 조각
긴 저녁을 시작하는 오늘의 행복 한 잔

나는 오늘 산책길에도 다짐하기를.

언제까지고 안과 밖으로 카메라를 들이밀며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계절을, 내가 현재 느끼는 기분들을 부지런히 기록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지금 지나는 계절을, 지금의 이 기분을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가 기억해준단 말인가.

누군가 보아 주길 바라지 않고, 좋아요 수치에 연연하지 않으며 오롯이 나의 것을 기록하기.


해가 나고 사람들이 걷고, 해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단조로운 시간의 흐름'은 오늘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행복'을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시대에 느끼고 있을 행복의 지표가 되고 있을 '오늘도 아무 일 없음'


https://youtu.be/cI8FS685Xh0?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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