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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보씨 Jan 12. 2021

시작은 늘 새하얀 빈종이 한 장

the new morning

국경 쪽으로

2021년 1월 1일, 아직 샛별 총총히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새벽 5시에 차를 몰아 폴란드에 접한 체코의 북쪽 국경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넓은 땅의 나라는 아니지만 오늘은 가시거리가 안 나올 만큼 안개가 짙고, 얼마 전에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길이 위험해서 속도를 낼 수 없기에 조금 일찍 출발했다.


체코는 새해 연휴이고 코로나 락다운 조치까지 겹쳐있으니 지금은 어느 마을에 도착하더라도 따뜻한 커피 한 잔, 맛있는 음식(맥도널드 마저 문을 닫았으니) 한 조각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오늘이 코로나 사태 이후에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난 첫 드라이브가 된 것이다.


차창 밖으로 무심하게 흘러가는 체코의 황량한 겨울 풍경을 보니 '지난 1년이 이런 식으로 잘도 흘러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1년 1월 1일 새해

정말이지 오랜만에 차를 달려서 나는 누구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까마득해질 만큼 경이로운 풍경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지만, 꼭 새롭게 뜨는 해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은 아니었고 나는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는 스타일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모두가 잠든 까만 새벽에 출발해 두어 시간쯤 북쪽을 향해 달려오니 우리는 어느 이름 모를 산 정상에 서 있었고, 때마침 오늘의 새로운 해가 뜨고 있는 타이밍이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여기까지 도착한 인간이었다.


저 멀리 낮은 산등성이에 포옥 안겨있는 듯한 작은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날이 슬슬 밝아오니 한 집 두 집 굴뚝에서 새로운 아침을 여는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누군가 아침을 여는 모습을 멀리서 관망하니 나와 똑같은 체코 사람들 사람살이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달까?! 

뜨는 새해를 보며 조금은 설레고 벅찬 내 마음에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함께 평점심이 피어올랐다.


이제 모두가 새로운 아침을 시작할 시간이다. 




산 아래까지 달려온 국도는 바로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자욱하고, 산으로 오르는 길은 얼마 전에 내린 눈이 녹을 기미가 없이 쌓여있어 느린 속도로 기어 올라온 산.

그리고 더 이상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산길에서 올해의 첫 잊지 못할 장면을 만났다.





펜티 사말라티 Pentti Sammallahti

좋아하는 핀란드 사진작가 중에 '펜티 사말라티'라는 작가가 있다.

몇 해 전 삼청동 어느 작은 갤러리에서 그의 사진전을 처음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핀란드, 노르웨이, 시베리아 등 설국의 잿빛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눈 속의 동물을 담아낸 담백한 사진이라 처음에는 크게 감동은 없었다.

사진가의 사진이라면 으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웅장한 자연이나 길 위의 사람들의 감정 하나까지 잡아낸 표정이 담긴 예술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사말라티의 사진엔 그런 굉장한 파워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1층과 2층으로 나누어진 전시를 두 번 둘러보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작가가 되었고, 서울에 눈이 오는 날에 맞춰 그 사진전을 한 번 더 보러 다녀왔었다.


좋아해서 그런지 가끔 그 사람의 사진을 은연중에 흉내 내보기도 하는 것 같다.




펜티 사말라티 The Russian Way

오늘 눈 쌓인 이 산길을 보니 그의 [The Russian Way] 시리즈 중의 한 사진이 떠올랐다.

건물만 한 높이의 눈꽃 쌓인 침엽수로 빼곡한 하얗고 검은 숲으로 이어지는 러시안 웨이와 그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설국의 사람들.











어쩌다 사랑에 빠진 잿빛 체코의 겨울

황량한 겨울의 전경이 아름다운 체코.

내가 이다지도 휑뎅그레한 장면을 사랑하게 되다니.

어.쩌.다 빠지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더니... 길고 혹독하다는 잿빛 체코의 겨울에 반해버렸다.




체코 국도변에서 만난 인상적인 장면

2020년을 시작할 때는 '그냥저냥 살아봐요, 어차피 우리 계획 따위 없는 거잖아'라는 말을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 써넣었었다. 그랬더니 정말 내가 세운 계획 따위 힘을 못쓸 만큼 세상에는 제약이 많이 생겼고, 그냥저냥 정부의 방침에 따라 매일을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계획이 없었고 코로나에 의한 제약으로 몸을 사리며 영역 안에서 일을 할 뿐 기억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코로나는 올해 역시 끝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에 맞춰 살아가는 방식을 취득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먼저 가 있는 것.

어린 마음과 치기 어린 시절의 스스로 고통받았던 생각과 일들은 이제와 생각해보면 모두 덧없는 것.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기억나는 일뿐이다.'

이런 문구가 생각이 나서 올해 새 다이어리를 열어 첫 장엔 새해다운 고운 글씨로 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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