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거의 매주, 적어도 2주에 한번은 경기도에 있는 본가에 내려간다. 그렇게 본가에 내려가는 주말이면, 토요일은 우리 가족이 오빠네 부부 집을 방문하고, 일요일에는 오빠네 가족이 우리 집을 방문하는 방식으로 거의 이틀 내내 가족들끼리 모여서 아이를 보며 지낸다. 요즘처럼 가족 안에서 포근함을 느끼고, 그들이 내게 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 공동체로서의 가족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조카를 보면 많은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는 걷고 말하는 것처럼 아주 기본적인 것들조차도 주변의 어른들의 보살핌과 인내로 익히게 되었구나. 아이는 결코 혼자서 기를 수 없고, 그래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구나. 우리 세대가 '아이를 낳고도 일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듯 우리 엄마도 20대 시절 그랬겠구나. 그럼에도 엄마는 나와 오빠를 낳고 기르기로 결정했구나. 여자로 일하기 더 힘들었을 그 시절에 엄마는 우리를 키우면서도 승진시험 공부를 하고 대학과 대학원에 가면서 지금까지 일을 해왔구나. 그래서 사춘기인 10대의 내가 내뱉은 철없는 말에 그렇게나 상처받은 눈을 하셨구나.
고백하자면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가족이란 단어는, 내게 소속되고 싶은 울타리라기 보다는 벗어나고 싶은 무언가에 가까웠다. 보수적이고 걱정이 많고 소통이 서투른 가족에게서 벗어나서 얼른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근데 요즘은 조카들을 보면서, 이 아이가 어디 다치진 않을까, 커서 위험한 일을 당하지는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덕분에, 그렇게나 답답했던 엄마가 조금은 이해가 간다. 답답하게 통금 시간을 고수하던 엄마의 모습 뒤에는, 아프게 태어난 나를 인큐베이터에 넣고 기도로 밤을 샜을 엄마와 겨우 걷기 시작한 아기이던 내가 넘어질까 뒤를 손으로 받치고 다녔을 엄마의 모습 또한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이를 낳으면 부모님께 효도하게 된다는데, 결혼도 안한 나는 친조카들 덕분에 간접적으로 그 체험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이를 한살한살 먹을 수록 어른들이 말했던 고리타분한 어떤 것들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게 된다. 소중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빠르게 전진하는 것만큼 함께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것 등등 말이다. 생각해보면 엄마와 나의 생애주기에서 비슷한 수준의 건장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함께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짧은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주에 생전 시도한 적 없는 엄마와의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다. 노래 가사처럼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하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