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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Jul 25. 2019

서른의 나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서른 랩소디


요즘 독서모임에서 한창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있다.

‘이름만 들어온 어려운 고전들은 함께 읽으면 읽힌다’는 취지로, 다 같이 용기를 모아 도전한다.

그렇게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열하일기 등을 읽어왔다.

뭐.

어쨌든 한 번은 읽었다.


지난달에는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이번 달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었다.    

‘변신 이야기’는 거의 모든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의 원류라고 보면 되는 작품이다.

다만, 신들의 이름이 모두 로마식으로 쓰여 있다.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시인인 오비디우스는 ‘문란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곳에서 쓴 책이 바로 ‘변신 이야기’다.


왜 오비디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변신’이라는 주제로 엮어 썼을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신이 사랑을 나누려고 동물이 되거나,

사람이나 요정이 간절히 기도하다가

나무나 꽃이 되거나,

오만과 탐욕으로 신의 저주를 받아

변화되기도 한다.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아폴론은 다프네를 뒤쫓고, 

다른 화살을 맞은 다프네는 아폴론을 피하여 도망친다. 아폴론이 너무나 싫었던 다프네는 결국 월계수 나무가 되어버린다.


어여뻤던 칼리스토는 제우스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헤라에 의해 곰으로 변한다.


뤼디아의 뱃사람들은 디오니소스를 우롱하다가

모두 돌고래가 되어 버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변신 중 하나는,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에 의해서 수사슴이 된 것이다.


개들과 함께 사냥에 나섰던 악타이온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동굴로 들어간다.

그곳에서는 처녀 신인 아르테미스가 요정들과 함께 목욕을 하고 있었다.

알몸을 들킨 아르테미스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끼며, 악타이온을 수사슴으로 만들어 버린다.

깜짝 놀라 동굴을 빠져나온 악타이온은

자신이 데려왔던 사냥개들에게 쫓기다가

결국 잡혀서 죽임을 당한다.


책에는 악타이온이 ‘길을 잃은 죄’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아르테미스가 너무했던 것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악타이온이 얼른 돌아서지 않고,

처녀신의 알몸을 더 보려고 하기라도 했을까?


만약 나라면, 이 순간에 어떻게 했을까?

본능을 억누르고, 재빨리 돌아설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니까.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간

수사슴이 되었을 것 같다.


오비디우스는 피타고라스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있다가 인간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이고, 인간의 육체에 있다가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 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변했을 뿐, 밀랍은 여전히 밀랍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가든 처음의 영혼 그대롭니다.
다만 다른 형상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서른이 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변신이다.

이전의 나와 달라지기 위해서도

변신이 필요하지만, 

이전의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변신이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변신은

나를 지키는 변신이다.


가끔은 형태를 바꾸어가면서라도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있다.

사회생활에 치이고, 돈벌이가 힘이 들어도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나의 열정을 어떻게든 이어 가야 한다.

인간관계가 어렵고, 사랑 때문에 속상해도

뾰족한 나를 깎으며 배워 가야 한다.

그리고 살 속에서 자연스레 용해되려 하는 근육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나를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사실 나빠지는 것은 쉽다.

그대로 두면 된다.

가만히 두는 것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변화하려고 하면 힘이 든다.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항상 노력이 필요하다.


변화는 노력이다.

그 상태에 머물지 않겠다는 발버둥이다.


서른의 나를 지켜 가는 것은 힘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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