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리음 마을의 선교사님 댁에는 고양이가 많다.
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 암컷 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는데, 둘 다 임신한 상태인 것 같았다.
노란색과 하얀색 검은색이 섞인 이 고양이들은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색깔이 ‘특이하다'거나 '이쁘다'라고 느껴지지 않고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고양이 자체를 무서워했기 때문에 색깔도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나는 고양이 눈이 무섭다.
고양이 눈은 꼭 뱀 눈처럼 눈동자가 얇은 타원 모양으로 작아지기도 하고, 밤에 그 눈을 마주할 때 빛이 나오면 정말 짐승처럼 보인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니 몸동작과 꼬리 하나까지 나에게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고양이들이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와 다리에다가 자기 몸을 비비거나,
심지어 무릎 위에 올라와 웅크리고 자는 것이 아닌가. 뜨악했다.
겁나서 이 고양이를 손으로 옮겨 치울 생각도 못했다. 그러면 고양이가 화날 것 같았고,
화나면 내가 무서워질 것 같았다.
올해 다시 선교사님 댁을 방문했다.
고양이 수는 두 마리에서 내가 오기 몇 주 전에 태어난 새끼들까지 합하면 열 마리가 넘었다.
나는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고양이들과 지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겁이 났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선교사님들에게
‘고양이가 방에만 안 들어오면 다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유미 선교사님은 내 방이 있는 건물은 고양이들이 주로 머무르는 부엌 건물과 달라서 '아마 오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셨다.
‘아마?’ 나는 이 '아마'도 겁이 났다.
마음속으로 더 확실한 것이 필요하다고 외쳤지만, 나는 '네'라고 말했다.
조그마한 고양이들도 많았지만
고양이는 고양이였다.
설거지하는 내 뒤를 소리 없이 쓰윽 지나가고,
밥을 먹고 있으면 옆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엉엉 울었다.
‘저리 가라고, 무섭다고.’
고양이가 많이 사는 집에서 자꾸 '고양이가 싫다'라고 징징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난 어른인데.
애교 많은 고양이들이 내 다리에 몸을 비비면
나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고양이들이 이런 내 마음을 조금은 아는지, 내가 그들을 피해 다니자 그들도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어느 날 나는 동그란 무늬가 있는 하늘하늘한 랩 스커트를 입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고양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턱시도를 입고 나비넥타이를 코에다 붙인 것 같이 생긴 고양이, 리봉이가 갑자기 내 무릎 위로 뛰어 올라왔다.
온몸을 낮췄다가 튀어 오르길래 엄청 센 충격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게 착지하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상체를 뒤로 젖히고 최대한 리봉이와 멀어지려고 했다.
리봉이는 가만히 앉아서도 그르렁거렸다.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리봉이 등을 조금 쓰다듬었다.
그랬더니 그르릉 소리는 더 커졌다.
도대체 왜 갑자기 이 고양이가 내 무릎 위에 올라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새끼를 낳은 어미 고양이 미유는 자꾸
내 다리에 자기 몸을 비볐다.
조금 어린 고양이들은 내가 앉아 있으면, 내 치마 끄트머리와 장난치면서 놀았다.
며칠 뒤 정민 선교사님이
‘고양이들은 천이나 부드러운 쿠션을 좋아한다' 고 얘기해주셔서 나의 의문이 풀렸다. 의문이 풀리자 나와 비슷한 걸 좋아하는 고양이들의 습성이 조금 귀엽게 보였다.
무섭게 생긴 애들이 부드러운 천을 좋아한다니.
생각해보니 고양이들이 아이들의 이불 위에 올라가 자거나, 화장실 앞에 놓인 수건 위에 누워서 자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본 것 같았다.
또 내 마음을 열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2주 전에 태어난 눈도 못 뜬 새끼 고양이들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얘들은 하나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 놈은 양쪽 눈이 반씩만 떠져있어 그걸 보고 한참 웃은 유미 선교사님이 '단춧구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또 한 놈은 꼭 대머리 아저씨처럼 머리 둘레에 까만색 무늬가 있어 ‘가발’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나머지 두 마리 중에 노란색 고양이는 라이언 킹에 나오는 '심바'로, 까만색과 흰색이 이마에서 절묘하게 갈리는 아이는 ‘스카'로 지어줬다.
새끼 고양이들의 눈은 파란색이다.
점점 자랄수록 눈의 색깔이 바뀐다.
하필이면 새끼 고양이들이 눈을 뜨는 그 순간에 내가 고양이들을 만나버렸다.
그리고 나도 고양이의 귀여움에 눈을 떴다.
이른 아침에 부엌으로 가려고 풀밭을 걸어가고 있으면, 멀리서 새끼 고양이가 달려왔다.
마치 강아지들처럼.
두부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낮잠을 자는데,
점점 몸이 뒤집어지고 팔다리가 올라간다.
살짝 실눈을 뜨고, 입도 살짝 벌린 채 기이한 자세로 단잠에 빠진다.
‘고양이는 하루에 스무 시간을 잔다’고 고양이 집사인 경남 전도사님이 말해주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서 온통 조용해지면,
집안 곳곳에 자리 잡은 고양이들은 낮잠을 잔다.
한 마리는 계단 안쪽에서, 또 한 마리는 우유를 담아온 박스 안에 들어가서, 또 한 마리는 수납장 위의 낡은 가방 위에서.
떠날 때가 가까워오자 고양이들과 점점 친해졌다.
고양이를 안아 올려 무릎 위에 두고 배를 만져 주기도 하고, 장난도 치고, 사진도 찍었다.
그래, 내가 고양이 사진을 찍는 날도 온 것이다.
고양이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세상이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이전에는 사랑하지 않던 존재에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니까.(얼마나 고양이가 무서웠으면.)
두려움의 영역에 있던 것이 사랑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는 것, 이렇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영역이 조금 더 커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기뻤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왔던 이번 휴가에서 세상의 또 한켠(고양이 세계)을 사랑하는 아주 큰 일을 한 것 같아 참 뿌듯하다.
관심이 없던 것을 관찰하는 것.
싫어하던 마음을 내려놓는 것.
두려워하던 것을 극복하는 것.
이해되지 않던 부분이 이해되는 것.
피하려고 했던 것을 직면하는 것.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는 것.
살면서 이런 순간들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참 소중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