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쳤어?”
진주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자신의 몸이 공중에 둥둥 떠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진주는 그게 공연히 신이 났다.
물론 꿈이겠지만, 이렇게 지겨운 세상을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참혹했다. 도시는 폐허로 변했고, 가끔 빈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들은 황량함을 더할 뿐이었다.
이상한 물체도 보였는데, 액체 상태와 고체 상태를 자유롭게 오가는 새로운 형태의 괴물체였다.
나중에 안 바로는 동물의 썩은 시체가 부패해서 발생한 액체에서 만들어진 신 물질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인류 멸망 이후 망가진 지구를 책임질 새로운 개체의 등장인 셈이다.
“앗! 아이언 맨이다!”
산 속 동굴에서 자신을 데려온 사람을 보고 진주가 소리 질렀다. 정말 아이언 맨과 똑같은 차림의 사람이 마스크를 벗었다.
우리가 아는, 세계적인 로봇 공학자이고 태양인의 앞잡이였던 길메시 교수였다.
“거봐. 오늘 분명히 손님이 올 거라고 했잖아.”
“손님 맞아요? 군식구 아냐? 지금 우리도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인데...”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요망한 늙은이. 지금 내 손에 죽어볼텨?”
“어라? 요 놈이 많이 컸네! 손이 발이 되게 빌 땐 언제고, 인제 멱살을 잡아?”
“멱살 안 잡게 됐냐고. 살려달라고 빌었지, 이 꼴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요 놈아.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너나 잘하세요. 우리마저 죽고 나면, 누가 영감을 찾기나 할까봐?
같이 끝나는 거라고. 다 죽는 거야. 몽땅!”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저 아이에게 기대를 걸어 보자고.”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진주를 쳐다보았다. 진주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살짝 긴장하였다.
두 사람은 바로 백면과 영랑이었는데, 주고받는 대화로 보아 백면이 다시 영랑을 소환한 모양이었다.
“저들은 강해. 불멸하고 영생한다고 하지.
허나 우리 인간은 약해. 불멸은커녕 매 순간 닥치는 시간의 파도를 넘기에 허덕거리지.
하지만 그게 우리 인간의 위대한 점이야! 시간의 파도를 탈줄 안다는 것!
저들은 시간이 영원한 줄 알아. 사실은 순간이라는 걸 모른다고.
위태롭게 시간의 파도를 타본 사람만이 영원을 경험하지! 스스로 영생한다고 믿는 자들은 이미 죽어있는 거야.
왜냐? 영원은 순간 속에만 존재하거든. 영원 속에는 순간들의 썩은 시체들만 즐비할 뿐이지.
저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좀비 같은 존재야.”
처음에는 영랑이 말하는 것 같더니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진주는 비몽사몽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중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시야는 흐렸으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있는가? 내가 보는 이 세상은 있는가?
내가 듣고 느끼는 이것들은 진짜인가? 아니다!
다 버려버려.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것에 종속된다. 태양인들이 자신들의 존재인 빛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그럼 나는 없는가?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의 그림자이다. 없다고 하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없지 않다. 나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 그 자체이다.
이것을 알아야만 태양인을 이길 수 있다!”
갑자기 배경의 공간이 사라지고 순 백색의 허공이 나타났다.
그 위로 진주가 겪은 과거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인상적인 사건들이 보였다 사라져갔다.
진주는 자신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에게 수련을 받는 네오 같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내 의식 속에 들어와서 나를 새로 프로그래밍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은 나인가?
나는 어제 태어나서 오늘을 살고 내일 죽는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태양인은 어떠한가? 그들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태어남도 없다. 잠시 물리적인 형태를 빌어 영생하는 존재이다.
태어나지 않으니 죽음도 없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변함없으니 시간이라는 개념이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은 태양인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족쇄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그 빛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떠돌다가 작은 행성 지구에 둥지를 틀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여, 지구는 물질적 공간의 절대치를 넘보게 되었다.
태양인들이 만들어낸 물질적 발전의 역사가 PPT처럼 보여진다.
“저들은 죽지 않으므로 오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저들은 울지 않으므로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지 못한다.
저들은 불멸 영생하므로 생사의 고통도 알지 못한다.
태양인은 시간을 모른다. 시간이 주는 변화의 위대함 역시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물질적 공간에만 관심이 있다. 시간의 유한성은 우리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다.”
“안녕! 들어는 봤니? 나 단군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나는 주몽. 동명왕이라고도 부르지. 고구려를 내가 세웠거든.”
“나는 대조영. 발해를 세웠지.”
“나는 웅녀야. 곰으로 살다가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지.
힘들면 마늘을 먹어. 좋아. 아주 좋아.”
“반갑다 진주. 나는 자네트. 잔 다르크라고 해야 알려나?
잘 해낼 거라 믿어.”
“너 반짝거리는 거 알고 있어? 나야, 캡틴 마블.”
다양한 인물들이 진주 앞에 나타나 인사를 했다.
특이한 것은 모두 인사를 한 다음 진주를 안으려고 했는데, 안아지지가 않았다. 허공을 감싸며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인물들이 나타났다. 진주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차츰 익숙해졌다.
아는 인물도 있고 모르는 인물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진주를 격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주는 점점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들과의 포옹도 이루어졌다.
“나야 유관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돼. 절대로 지지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는 윤동주.”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결코 시간이 멈춰질 순 없다.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 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오빠 알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엄청.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알고 있죠? 나의 아가씨.”
서태지가 웃으며 다가와 포옹을 하더니 이어 아이유가 조심스럽게 진주를 감싸 안았다.
진주도 아이유를 마주 안았는데, 갑자기 아이유가 진주의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버렸다.
깜짝 놀라 당황하는 차에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앞에 다가와 섰다.
“툰베리예요. 지구를 살려주세요, 꼭!”
“아빠가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죽어도 살아 있어야 돼.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는 걱정 마. 너만 걱정 해. 알았지?”
“괜찮아. 네가 주인공이잖아.”
툰베리와 아빠와 엄마와 미완법사가 차례로 다가와 진주와 합해졌다.
그리고 낯선 듯 친숙한 얼굴이 진주 앞에 나타났다.
“안녕.”
그것은 진주였다.
진주는 앞에 있는 또 다른 진주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릴 적의 모습부터 늙어버린 모습의 진주까지 번갈아가며 보였다.
아니, 그 모든 세월이 합쳐진 모습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진주가 모두 합쳐진 모습이 앞에 서 있었다.
“잘 해보자. 파이팅!”
앞의 진주가 다가와 진주를 안았다.
진주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힘껏 마주 안았다. 진주가 진주를 안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진주는 단군 이래 조상과 동시대 인물들이 해준 격려가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나이자 그들이고, 나는 우리 모두이다.
모든 미래와 모든 과거는 현재라는, 나라는 한 점에 집중되어 있다!
그 무엇도 나를 없앨 수 없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