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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오세 Oct 27. 2024

호기심을 무시하지 않으면 인생은 흥미로워

  연말이 되니 마음이 뒤숭숭하다. 매년 쓰던 연말 버킷리스트를 쓰는 대신 올해는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쓴다. 두 달 후면 30대 중반이 된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간다. 남자친구의 말대로 이제는 무슨 일을 해도 나이가 메리트가 될 시기는 확실히 지났건만, 나는 애매한 내 나이가 왜 이리도 신경 쓰일까. 곧 30대 중반이 되는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크고 작은 수술로 너덜거리는 몸과 갖가지 실패의 경험. 어쭙잖은 신념과 고집. 아직은 배가 덜 고픈지 굶을 용기로 부려보는 객기.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살짝 꺾인 기운. 그리고 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불안과 초조. 늘어놓고 보니 암울하기 그지없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좋은 것 하나는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빈 화면을 노려보자니 슬그머니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호기심이다. 

  반에 꼭 한둘씩은 있는 질문이 많은 학생, 누구 먼저 해볼 사람? 하면 번쩍 손을 들던 학생.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그냥 뭐든 일단 한번 해보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기질과 저지르고 보는 성격 덕분에 20대에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이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반성으로 온갖 호기심을 억누르고 있다. 그럼에도 기질은 쉬이 변하지 않아 소소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요즘이다.

  얼마 전 광흥창역 근처에서 모임이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언제나처럼 제멋대로 걷다가 처음 와본 동네에서 길을 잃었다. 지도를 켜서 역으로 가는 길을 찾아 걷는데 길 건너편에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오후 네시'라는 맑은 빨간색의 간판이었다. '일요일 오후 세시'를 줄인 일오세를 닉네임으로 쓰는 나에게 오후 네시라는 이름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마침 건너편으로 가려면 한참을 걸어 저 끝에 있는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했기에 저 횡단보도에 닿기까지만 저 바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해 보기로 했다. 물론 그 생각이 끝나자마자 내달려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바에 들어갔지만.



  간판부터 마음에 쏙 들었던 바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앞으로 이곳에 오기 위해 이름조차 익숙지 않은 광흥창에 오겠구나 싶었다. 친구로 보이는 젊은 남성 둘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바에 앉았다. 중년의 사장님은 독특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인사를 건네셨다. 사장님께서 건네주신 메뉴판을 펼쳐 곧바로 기네스 흑맥주를 시키곤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두리번두리번 가게 곳곳을 훑었다. 그런데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언젠가 한번 왔던 곳인가 싶을 정도로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 하지만 광흥창이라는 역의 존재를 이번 모임에 참석하느라 알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리는 없었다. 묘한 기분을 애써 뒤로 하고 다시 메뉴판을 살폈다. 손으로 그리고 적은듯한 독특한 메뉴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손때 묻은 아름다운 메뉴판이었다. 그런데 메뉴판 구석에 아주 작게 적힌 'Bar다'라는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사귄 첫 해 내 생일에 남자친구가 데려가 준 홍대의 작은 바. 그 이후로 매년 생일마다 그 바에 갔다. 일 년에 딱 한번 가지만 그 어느 곳보다 내가 좋아하는 작고 투박한 바. 사장님이 '그 Bar다'를 만드신 분이었던 거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사장님께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기네스와 같이 나온 기본 안주가 Bar다처럼 마른 멸치에 고추장이었다. 실소가 나왔다. 참 취향이라는 것은 무섭도록 정확하지. 이런 순간들이 오면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누군가의 영화에서 주연 13 정도 될 것 같은 내 인생이 퍽 신비롭게 느껴진다. 

  그날은 오후네시 바의 큰 테이블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따위의 이야기를 나누고, 오아시스와 본 조비 노래들을 이어서 듣고, 사장님께 아드벡 우거다일을 얻어 마시고는 옆자리 손님이 쏘신 기네스도 한잔 더 마시고 잔뜩 신이 난 채로 집에 돌아왔다. 딱 맥주 한잔만 마시려고 했지만 피치 못하게 그럴 수 없는 날들도 있는 거니까, 뭐. 바 사장님께서 서비스 안주로 내어주신 애플파이가 나에게 기네스를 쏘신 옆자리 손님이 만드신 거였고, 내가 먹자마자 "어.. 이거 먹어본 맛인데요? 서촌에서 먹어본 것 같은 맛이다." 했더니 정말 그 옆자리 손님이 서촌 그 카페의 사장님이셨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 이런 날에는 컨디션과 지갑이 허락하는 대로 술을 마셔줘야 후회가 없는 법이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다음날 머리가 꽤나 지끈거리겠구나 싶었지만 나의 호기심을 무시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무턱대고 해보는, 말 걸어보는, 저질러보는 나의 성격이 가끔은 얼마나 기특한지 생각했다. 나이 서른이 넘어 이력서에 적어 내릴 그럴듯한 경력들은 없지만 호기심 덕분에 재밌는 경험은 많이 했지. 젊을 때는 시간이 많지만 돈이 없고 나이가 들면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는 것처럼 번듯한 경력과 흥미로운 경험들은 함께하기 어려운 것들일까. 주연으로 살아가는 누군가는 다 가질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한 주연 13 정도의 인물일 뿐이니까. 관성처럼 또 두 가지를 저울질하며 자조적인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런 생각이 내달리는 순간을 억지로 멈추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어차피 나는 또다시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면 고민할 새도 없이 내달릴 사람이니까. 어떻게 살면 인생이 흥미진진해지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모든 순간에 그냥 나를 내버려 두자고 생각한다. 사장님께 선물로 받은 오후 네시 책을 읽고, 다음에는 나도 작은 선물을 들고 가야지, 광흥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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