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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립 Feb 01. 2024

소방관 친구의 죽음

나는 어떤 심정으로 하루를 보냈는가

한참 조용하던 카톡방이 요란했다. 별 생각 없이 들어간 카톡방에서 마주하게 된 친구의 죽음. 친구는 소방관이었다. 불이 난 공장 안에 사람이 있는지 살피러 들어갔다가 그는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다. 

사실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다.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같은 반이기도 했지만 그와 나는 결이 비슷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가장 가까운 교감은,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던 중 하이파이브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와 잘 이야기하지도, 같이 급식을 먹으러 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실 그의 죽음을 접하고 내게 몰려온 감정은 상실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라는 느낌에 가까웠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마도 그건 삶과 죽음, 그 경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까지는 살아있었고, 죽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확실히 죽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구분에 타협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죽음이라는 사건에는 "불이 나서, 그리고 소방관이었기에 건물 속에 들어갔고, 빠져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라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아마도) 건강한 청년이었던 그가 하루 아침에 세상을 떠났고, 앞으로는 살아있는 그를 직접 마주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는 무언가 허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있을 때 나는 그와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가깝지 않았기 때문에 장례식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아침 부고를 접하고, 출근하고 일하는 것이 평소보다 버겁게 느껴졌다. 출근 길에 회사를 향해 걸어가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는 죽음과 대비되는 삶을 좀 더 기쁘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기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마음은 삶의 허무함, 부질없음같은 것들에 좀 더 가까웠다. 그가 죽었지만, 많은 매체들이 그의 죽음을 말하고 있었지만, 세상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모니터를 보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가끔 웃고, 회의에 참석했다. 오전 내내 나는 오후 반차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의 죽음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깊고 강렬한 타격을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회사와 일에 대한 지겨움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누군가에게 친구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우울감을 나눠주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어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휴가를 쓰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음악을 들으며 일에 몰입하니 오전 내내 머릿속에 끼어있던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퇴근을 하고, 탁구를 칠 때쯤 나의 마음은 거의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언젠가 나도 죽게될 것이다. 어쩌면 나의 뇌에 있는 자아와 기억들이 디지털 정보로 변환되어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날이 내가 죽기 전 도래할 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나도 결국 죽게될 것이라는 사실만큼 명확한 사실은 없다. 죽음의 시점을 약 60년 뒤 쯤으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오늘과 같은 일을 마주할 때면 그들도 나와 같이 생각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삶을 살아가는 태도나 삶의 방향에 대해 변화가 생기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소방관인 내 동생이 앞으로 무사하기를, 그리고 내 친구가 많이 고통스럽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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