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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심 Sep 15. 2021

식판은 나의 정체성이었다.


 의사의 오진으로 자신이 ‘뇌병변 장애인’ 줄 알고 살다가 ‘세가와 병’인 것을 알게 된 사람에 대하여 EBS 메디컬 다큐 7 요일에 방영되었다.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된 그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사연을 접한 나 또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간 입원을 하여서 정밀검사를 다시 받아 보았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비장애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나에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사하면서 장애가 말끔히 고쳐지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딱 하나 내 식판을 직접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손 떨림이 약해지기를 바랐다.     


 직장에서 한 선생님께서 식사시간마다 ‘나의 식판을 들어다 주는 것이 귀찮은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장애인이라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다. 마음으로는 ‘앞으로 내가 식판을 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체가 미안한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나 스스로가 식판을 들 수 있는 기적은 현재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식판을 들고 싶다. 그렇게 되면 더 먹고 싶어도 들어주시는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에 참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가 있다. 굳이 그 선생님께 사과해야 한다면 ‘나의 식판을 들어주는 것에 대하여 귀찮아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탁드린 부분을 사과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선생님은 ‘식판 드는 거 연습해봐, 국물이 적으면 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맛있는 국이 나와서 더 먹고 싶어도 적게 받아야 하는 것에 대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장애’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다. 연습하면 ‘짠’하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걷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뛰는 연습해보라는 말과 같다.


 매번 식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나 자신이 그 누구보다 불편하고 미안하다. 원에서 하루에 한두 번은 밥을 먹는다. 식사시간마다 식판을 볼 때마다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말을 들은 후 식판을 받을 때마다 ‘나는 귀찮은 존재’라는 것과 ‘저 선생님도 나의 식판을 들어주는 것이 귀찮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라는 것이 매 순간 상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식판을 들어주는 것이 귀찮다고 느끼는 것은 선생님들의 감정이다. 내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시설에 계시는 장애인이 나의 식판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다. 그들에게 도움을 줘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도움을 받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다.  그 말을 들은 후 ‘귀찮다’고 말한 선생님께는 더 이상 ‘식판을 들어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라서 도움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존재지만, 상처를 되새기면서까지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는 않다. 식판을 들어주는 것이 귀찮다고 자신의 의사를 밝힌 선생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 다행이고, 귀찮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식판을 들어주시는 선생님들이 들어주시는 호의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런 일을 겪은 후 시설장애인들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귀찮다’는 내색을 한 적은 없는지 내 모습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무심결에 나의 본심이 튀어나와 장애인들을 눈치 보거나 위축하게 만든 건 아닌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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