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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Mar 20. 2024

미련에 대해 쓰기2

애쓰는밤 240314-240320

안녕하세요, 퇴사 취소자 박현정입니다. 일주일 전 저는 이 자리에서 호기롭게 퇴사를 선언했었는데요, 오늘 그 선언을 회수하려고 합니다. 아, 본격적인 글 시작에 앞서 이번주에도 역시나 저의 퇴사 이야기를 읽게 된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 먼저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사직서는 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도 저는 아주 확고하게 퇴사를 결정한 상태였어요. 진짜로요. 이미 사무실 서랍도 싹 비웠고요, 내일은 친한 회사 사람들과 송별회식도 하기로 했습니다. 진짜 진짜 그만둘 생각이었어요.


우선 지난 월요일, 제가 사직서를 제출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2월 말 조직 개편 이후 저희 팀은 외부에서 영입된 새로운 부서장님이 맡게 되셨는데요. 이 말은 그러니까, 새 부서장님은 아직 제 이름도 모르고 직급도 모르고 뭐 하는 애인지도 모른다는 이야깁니다. 새 부서장님과의 첫 대면을 "안녕하세요, 이사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로 시작했더라는 말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서장님은 교육을 듣는 중이라 지금은 조금 어렵겠다고 말씀하셨고, 교육 나부랭이에 밀려 열이 받은 저는 자리로 돌아와 바로 메일 한 통을 날렸습니다. 첫인사를 이렇게 하게 되어 안타깝지만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고, 얼굴 보고 말씀드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면담을 요청했으나 바쁘시니 메일로 인사를 전한다고요. 솔직한 마음은 아니지만 예의상 새로운 시작에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과 건승을 빈다는 말까지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임시 저장되어 있던 사직서를 열어 전결재 요청 버튼을 눌렀죠.


제 사직서는 그 즉시 경영지원실의 전 직원과 HR 담당 상무님, 부서장님께 전달되었고, 차례대로 이어질 승인 행렬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첫 호출은 경영지원실이었습니다. 그간 친하게 지내오던 인사 담당 김차장님과 앉아서 30분, 교육 담당 박차장님과 10분. 명목상 퇴사 사유는 가족 돌봄이었고, 두 분 모두 작년에 있었던 아빠의 사고에 대해 잘 알고 계셨던지라 두 차례의 면담은 큰 무리 없이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면담은 전 부서장이었습니다. 제 퇴사의 주범인,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싫은 그 사람. 교육 듣느라 바쁜 새 부서장은 전 부서장의 만행을 모르는 듯했습니다. 그에게 제 면담을 맡기다니요. 전 부서장과 마주 앉아 40분, 옛날 옛적 까만 도스 화면을 띄워놓고 개발하던 시절부터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더군요. 그리고 이어지는 가스라이팅. 네이버 갈 거 아니면 어딜 가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나, 당신이 보기에 제가 aggressive한 직원이 아니라나 뭐라나. 맞은편에 앉아 불안한 동공으로 라떼는 말이야를 이어가는 전 부서장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수만 가지 할 말이 떠오르다가도 금세 가라앉는 걸 보니 아, 나 정말 마음이 떠버렸구나, 하고요.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저는 답했습니다. 더 생각해도 마음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고요. 그는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바로 답변 보내지는 말고 이틀 정도 더 생각해 보고 새 부서장님께 이야기하라고요. 저 이틀이라는 시간은 누구를 위한 시간인 걸까요?


다음날, 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HR 담당 상무님을 마주쳤습니다. 상무님은 과하게 해맑은 얼굴로, "현정대리 찾으러 가던 길이었는데! 커피 한 잔 할까?"라며 저를 지하의 단골 카페로 이끄셨죠. 역시나 이어지는 라떼는 말이야. 그리고 이어지는 밖에 나가면 개고생이다, 네 마음처럼 쉽지 않을 거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이때 든 생각. 왜 이 사람들은 직원을 깎아내리기 바쁠까, 그거 제 얼굴이 침 뱉기인데. 그는 퇴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어도 사람들에게는 아직 말하지 말라며, 카페로 들어오는 사업전략팀 윤과장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날 면담 중 마주친 열다섯 번째 우리 회사 직원이었죠.


면담을 마치고 회사에 올라와보니 이미 제 퇴사가 기정사실화 되어 있더군요. 지금 지하 카페에서 현정이가 최상무를 만나고 있다더라, 하면서요. 오늘따라 끈덕하게 달라붙는 사람들의 눈초리와 시끄러운 물음표로 가득 찬 사내 메신저를 잠시 외면하고 새 부서장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재고해 보았지만 생각에 변화가 없다고요. 제 인내심은 딱 하루짜리였습니다.


사직서를 제출한 지 4일째. 여전히 승인되지 않은 사직서를 새로고침하며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이런 식이군. 그때 새 부서장에게서 온 메시지 한 통. "안녕하세요, 대리님. 시간 되시면 지금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어색한 공기 속 마주 앉은 자리. 그곳에서 제 철옹성 같던 결심을 와장창 부숴버릴 작은 구멍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Elastic Search, 그래, 나 그거 해보고 싶었었는데, 그때 여력이 안 돼서 못했었는데, 나 데이터 분석에도 관심 있는데, 맞아, 키워드 검색, 의미 기반 검색, 우와, 진짜 재밌겠다, 나 진짜 이거 할 수 있나? 이 분 다음 검색 출신이라던데, 여기 있으면 검색 엔지니어링 경험해 볼 수 있나? 진짜 가능한가?


네, 사실 제가 바라던 건 이런 거였습니다. 저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새 부서장님은 저의 퇴사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본인이 이 회사에 온 이유, 지금까지 해왔던 일,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방향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죠. 4년차 주니어 개발자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그는 제가 가려움을 느끼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고 속시원히 긁어주었습니다. 그 끝에 함께 가보자는 말이 나왔을 때, 두텁게 쌓아 올린 벽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저를 왜 붙잡으시는지 모르겠다고, 저에 대해 잘 모르시지 않냐고. 그는 답했습니다. 맞다고, 제가 대리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한 번 같이 가보자고 말하는 이유는 대리님이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고. 자존심상 주말 동안만 더 고민해 보겠다고 말하며 일어섰지만,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저의 견고한 성이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는 걸요.


다시 월요일, 제출했던 사직서를 회수했습니다. 누군가는 회사 생활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그 말을 믿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제가 사탕발림에 속아 넘어간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제가 이 길을 선택한 건, 제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미련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저는 일에 대한 미련, 사람에 대한 미련, 조직에 대한 미련을 끝끝내 저버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네가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이미 주저앉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요. 아무튼 저는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끝이 다시 사직서를 제출하는 일일지라도 일단은 가봅니다. 가다 보면 알게 되겠죠. 오늘의 결정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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