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밸리 역할 조직 vs. 한국 위계 조직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에서 2년 근무하고 한국 대기업에 입사한지 2년 5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박스에 갇힌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머리에 열이 화끈화끈 오르는 순간들이 있지만 이제는 나름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으며 번듯하게 자리 잡은 느낌이다. 세심히 들여다볼 여유도 없이 지난 2년을 전력질주하면서 죽기보다 회사 가는 게 싫던 날에는 그저 한국에 적응 못하는 내 문제라 생각했고, 내가 순응하고 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제야 어느 정도 안정된 마음으로 그간의 회사 생활을 되돌아보니 다음과 같은 이해와 반성이 가능했다.
미국에서 6년을 생활하면서 내가 배우고 성장한 환경이 한국의 위계 조직과는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자기 완결적 업무 수행에 익숙하고 전문가(Specialist)로서 내 역할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때문에 내가 전체 프로젝트/프로덕트 방향에서 미션과 목적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매니저의 완전한 동의 없이도 내 판단대로 일을 진행했고, 그에 따른 결과를 책임지고자 했다. 하지만 한국의 위계 질서 문화에서 나는 꽤 당돌해 보였던 듯 하다. 내가 입사해서 처음 6개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왜 보고서 안 만들어 와? 승인 안 받아?"였다. 스크럼 회의에서 하는 공유와 글머리 기호(bullet point), 텍스트만으로 간결히 정리한 PPT는 보고로서 충분하지 않았다. 동의는 굳이 필요한 게 아니고, 생각이 다르다면 그 부분을 잊지 말고 고민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내게 '승인'은 필수적인 절차로 요구되었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루고자 하는 내게 돌아오는 말은 "아직 소영 선임이 잘 몰라서 그래. 이렇게 하라고 하면 하는 거야."였다. 내게는 결정권이 없지만 회사는 'F&F(flat and flexible) 조직'이란 것을 방패 삼아 연공서열이 없는 것처럼 홍보했다. 조직 구성도 내 팀을 없애고 직급도 두 가지로 통일하는 등 표면적인 F&F는 골격을 갖추었는지 몰라도 본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진 건 아니다. 성과주의에서 기여주의로 변모하고 360도 평가가 당연시 되며, 점수 기반의 공채 채용이 아니라 경력 사원을 채용하듯 직무 역량 기반의 수시 채용이 가능할 때 진정한 의미의 F&F가 가능할 것이다.
2년의 인턴십을 거쳐 최종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한 분야가 빅 데이터였을 뿐이다. 한국으로 이직하면서 블록체인을 선택한 건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일하지 않고 프로덕트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에서 2년을 데이터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단 한 번도 4차 산업 혁명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다들 내가 "4차 산업 혁명이 낳은 인재"라고 했다. '인재'라는 단어가 굉장히 부담스러웠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4차 산업 혁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할 말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자체가 생소했고, 어디 가서 실리콘 밸리에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프로덕트를 만들 때 회사는 항상 벤치마킹을 하고, 경쟁사 대비 차별화 포인트를 고민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 회사가, 그리고 많은 한국 기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주어진 프로젝트에서 반드시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혁신 사례를 만들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하면 혁신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블록체인이든 빅 데이터든 신기술이 필요하다면 그 기술을 활용하면 된다. 시작부터 무조건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써야 한다고 울타리를 치면 그 울타리 안에서만 생각이 가능한데, 어떻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신제품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중간에 요구 사항이 바뀌면 기존 개발된 것에서 요구 사항을 맞추기 위한 우회 방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WBS에서 협의한 기간 안에 개발을 완수해야 하므로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는 상처에 잠시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는 격이다. 지난 2년 동안 이렇게 프로덕트를 개발하다 보니 임기응변만 늘고 딱히 포트폴리오에 쓸 만한 성과를 내지 못 했다. 성과가 부진하다 보니 요즘 회사에서 가장 자주 하는 생각이 최소한으로 일하고 최대한으로 돈 벌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회사 생활에 많이 지쳤다. 일을 열심히 하면 어떤 사람들은 "적당히 일했으면 좋겠어. 같이 일하는 사람이나 다음 번에 네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도 좀 생각해."라고 말했다. 힘 빠지는 소리다. 주변을 둘러보니 적당한 시기에 열과 성을 다해 일한 '척'을 잘하는, 외교적인 사람들이 인정 받는 것 같았다. 사실 열심히 일한다고 인정 받는 것도 아니고, 평가를 잘 받아도 내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적은데, 적당히 일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인정 받는 사람이 똑똑한 거 아닐까?
소영 선임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잖아. 지금은 능력치만큼 일하지 않잖아. 물론 정답은 없지만 그렇게 일하다 보면 결국 내 나이 정도 됐을 때 어느 것 하나 특출나지 못하게 돼.
내가 우리 팀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믿는, 정말 좋아하는 선배가 말했다. 다른 사람 말이었으면 그냥 무시하고 넘겼을 텐데, 내가 워낙 높이 사는 선배가 이런 말을 하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실패할지라도 도전하고 싶고, 도전과 실패를 통해 배우고 싶은데, 한국의 위계 조직은 항상 안전한 길만 갈 수 있다고 나를 제한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런 도전을 해보자고 희망찬 계획을 먼저 제안하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까이다 보니 '내가 굳이 왜 밤낮 없이 고민해서 어차피 못 할 계획을 세우겠어?' 하는 생각을 했고, 요구하는 선을 넘지 않고 일하는 것이 가장 속 편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
마음가짐의 변화가 필요한 것 같다. 내가 언제부터 누구 말을 그렇게 잘 들었던가?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반항'이라는 단어를 떼어 낸 적 있던가? 세월의 풍파를 겪고 월급이 주는 안정감에 취해 내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큰 손해다. 부모님이 비싼 학비를 부담해서 미국에서 공부하게 해주셨는데 그곳에서 배운 것을 고작 2년 5개월만에 잃을 수는 없다. 위계 조직에서 쉽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나는 현재 우리 회사가 위계 조직에서 역할 조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많진 않지만 나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들과 어떻게 성장과 혁신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그래서 '밀레니얼은 처음이라서'와 같은 리버스 멘토링(reverse mentoring)을 진행하기도 하고, 회사에 실리콘 밸리 문화가 스며들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자극을 준다. 스피크업(speak-up)을 통해 위계 조직을 체화한 분들께 다른 관점을 제시하기도 하고, 일을 잘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집중할 것 같아 직급을 뛰어넘는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때로는 따가운 눈초리에 사기가 꺾이기도 하지만 개인에서 팀, 팀에서 그룹으로 퍼지는 변화의 물결이 궁극적으로는 회사 전체에 퍼지고, 자기 발전과 실용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을 위한 역할 중심적, 기여주의의 문화가 완성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