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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롱 Feb 09. 2021

내가 딩크족인 이유

엄마 역할을 간접 체험하면서 엄마 마음을 알게 되었다. 참 가슴 아프다.

결혼은 하고 싶은데 아이는 갖고 싶지 않다. 어른들은 걱정하는 말로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혹시 나중에 마음 바뀔지 모르니 말이라도 조심해.” 하는데,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하지 못 한다. 아이를 무척 좋아하고 예뻐하는 편이라 이전에 돌봄 봉사 할 때도 “아이고, 젊은 친구가 어쩜 그렇게 아이들을 잘 다뤄? 유치원 선생님 했어도 참 잘했겠어.” 소리를 들었지만, 글쎄... 아이를 예뻐하는 것과 내가 낳아 키우는 건 다른 문제 아닐까?


아이 낳는 고통은 둘째 치고 아이 키우는 일은 늘 내게 돈은 돈대로 오지게 들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징하게 고된 일로 여겨졌다. 누구는 좋은 엄마 되는 법을 알아 엄마가 되었겠냐만은 나는 더욱이 좋은 엄마 될 자신도 없고, 아이를 위해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을 희생할 만큼 투철한 희생 정신도 없다. 나 하나 이 살벌한 세상에서 지켜내기 버거운데 내가 감히 누굴 보호하겠는가. 엄마는 “네가 이기적이라 그래. 나는 너도 애 키우는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라고 말하지만, 이마를 딱 때리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아니, 내가 나 같이 예민하고 까칠한 자식 낳아 왜 사서 마음 고생해야 돼?


그러고 싶지 않은 게 내 마음 아니겠는가.


나는 내가 버는 돈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고 싶다. 워낙 욕심이 많아 나는 아직도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참 많다. 근데 아이를 낳으면 날 위해 살 옷, 가방 대신 아이 옷, 신발을 사야 하지 않을까? 그 뿐이겠어? 지금 내가 주중, 주말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취미 생활, 직장에서 지친 만큼 재충전하기 위한 세계 여행 등 나를 위해 쓰던 시간들이 이젠 엄마라는 의무감과 무게감으로 잊혀지지 않겠는가? 내가 없고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내가 남을 게 싫다.


나는 꾸준히 직장 생활 하고 싶은데, 애 키우며 회사 다니는 언니들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니다.

저럴 바엔 그냥 직장 관두고 집에서 애나 보지.

말은 못 해도 여자인 나조차 가끔은 아이 챙긴다고 몇 시간씩 일찍 퇴근하는 언니들이 괘씸해 보이는데, 만약 내가 애를 낳아 키운다면 누군가도 나를 보며 그런 생각하지 않을까. 슬프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이렇게 코딱지만 한 마음을 가진 내가 고 2 사촌 동생을 한 달 동안 왜 돌보겠다고 했을까. 뭐가 그리 자신만만했을까. (여기까지 서론이 참 길었다.) 사실 고 2면 어느 정도 컸다 생각했다. 엄마도 늘 “서현이 어른스러워.” 했으니까. 근데... 개뿔! 대체 어디가 어른스럽다는 거지? 안 그래도 애 낳기 싫었는데, 몇 주 엄마 체험하고 나니 딩크족으로 살겠다는 내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든다. 이러니 내가 애 낳기 싫지!


쓰레기는 쌓아두기만 하고 버리지는 않지, 샤워하고 나오면 화장실 벽과 바닥에 잔뜩 흩뿌려진 머리카락... 어떻게 안 치우고 그냥 나오는 거야? 어릴 때 엄마한테 자주 듣던 말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너 그렇게 행동하면 가정 교육 못 받았다 소리 들어. 엄마 욕 먹이지 말고 처신 잘해.”

이모는 여태 뭘 한 거야?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른 건 다 참아도 하나 정말 미치도록 참기 어려운 건 내 물건을 허락 없이, 마음대로 쓴다는 것. 그러고도 거짓말까지 한다. 지난 밤 자기 동생은 중학생인데 얼마나 진하게 화장하는지 모른다며 신나게 욕할 땐 언제고, 다음 날 아침 내 화장대를 보니 파우더며, 블러셔까지 다 찍어 바르고 나갔더라. 나도 아까워서 잘 못 바르는 비싼 기초 제품들은 어찌나 써 대는지, 분명 내가 손 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대체 내 말은 어디로 들어 먹은 거야? 씹어 먹었나? 그래서 겨우 한 마디 하면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더 까칠하게 군다. 에휴, 속 터져.


사춘기 소녀 마음에 혹여라도 상처 될까봐, 안 그래도 낮은 자존감 더 낮아질까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 조심스럽다가도 ‘내가 엄마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야 돼?’라는 생각에 다다르는데, 그럴수록 엄마 역할이 얼마나 섬세해야 하는지 진절머리가 난다. 나야 내 자식이 아니니 어느 정도 마음에서 놓고 그러려니 하지만 막상 엄마면 얼마나 답답할까. 내 아무리 애정을 쏟아 부은다고 한들 그 마음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럼에도 엄마는 튕겨져 나올 것을 뻔히 아는 애정도 혹시나 모를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내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 얼마나 힘든 감정 노동인가. 내가 마다할 수 있다면 꼭 마다하고 싶은 게 이런 거다. 내가 엄마로서 마음 쓰고 싶지 않은 게 바로 이런 거다.


아무리 부족함 없이 해주고 사랑으로 키웠어도 아이들의 마음이 항상 내 마음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거. 아이들은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말 말도 안 되게 엇나간다는 거. 그래서 우리 엄마도 나와 동생 덕에 겸손을 배웠다고 한다. 나와 동생이 엄마 말 잘 듣고 속 썩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잘 자라줬다면 엄마 인생이 너무 순탄했을 거란다. (물론 나는 우리가 아니어도 엄마 인생이 순탄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가 아니었으면 겸손이란 걸 모르고 항상 ‘나 잘났어' 하는 마음으로 콧대 높여 살았을 거란다. 그런데 우리 덕에 가끔은 고개 숙일 일도 있었다고...


사촌 동생을 돌보면서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게 든다. 물론 내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도. 고생은 사서 하는 게 아니라고 굳이 아이 키우면서 애타고 싶지 않다. 내 성격에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쏟은 만큼 아이가 따라주지 않을 때,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날 ‘좋지 않은 엄마'로 만들 때, 나는 그 상처를 감당 못 할 거 같거든. 내 자식 아닌 아이 한 달 봐주면서도 신경 쓰이는 게 이렇게나 많은데, 내 아이면 오죽할까.


이번 주면 사촌 동생과의 동거도 끝이다. 더불어 엄마 역할 체험도 막을 내린다. 다시 한 번 딩크족에 대한 내 생각을 되돌이켜 본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내 생각이 어쩌면 우리 엄마가 내게 해준 것만큼 해낼 자신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또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 마음을 뿌리 깊게 이해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그때는 내가 자라면서 얼마나 엄마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는지, 얼마나 엄마를 서운하게 했는지 알게 될 텐데, 그 건 참 무서울 것 같다. 슬픔이 몰려온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엄마에게 평생 갚지 못 할 사랑과 희생에 감사하다. 사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로도 부족하지만...


엄마, 너무 고생 많았고 앞으로는 엄마 위해 살아요.
고마워,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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