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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썸머 Jun 15. 2023

잠깐 모른 척 눈감았더니

책육아 실패담

아이가 태어나고 꼬박 7년, 내가 하루도 쉬지 않고 해냈던 일 중 하나는 잠자리 독서였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날에도, 감기몸살로 온몸이 으슬으슬한 날에도, 금요일 밤 남편과 맥주 한 잔으로 얼굴이 붉어진 날에도,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 아이가 원했기 때문에 쉬지 않고 열심을 다했다.


아이 책을 읽어주다 눈이 스르르 내려앉아 깜빡 졸기라도 하면 살포시 엄마의 볼을 두드리며 ‘일어나요 엄마, 다음 읽어줘야지.’를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이뻐서 힘을 내곤 했다. 남편이 가장 힘들어한 일이 바로 이 잠자리 독서. 매일 읽어준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어쩌다 한 번 가뭄에 콩 나듯 기회를 주는 건데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다른 걸 할게. 제발!’을 외치며 숨어 다녔다. 그래도 남편이 가끔 아주 가끔은 한 번씩 등 떠밀려 아이 곁에서 그림책을 읽어주곤 했다.


한글이든 영어든 관계도 없이 아이는 통째로 책을 외웠다. 읽은 책을 읽고 또 읽고 도저히 지겨워서 못 읽겠는 엄마의 마음은 생각도 안 하는지 새벽이 되도록 또 또 를 외쳤다. 서 너살 밖에 안된 아이가 책을 들고 줄줄 외운 이야기를 마치 읽어주듯 시늉을 하며 애교를 부렸고 그런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아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 같다.


그 덕에 나는 결혼 전에 꽁꽁 숨겨두었던 주머닛돈을 야금야금 꺼내어 전집 지옥으로 들어가면서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책 속에서 아이와 함께 보고 경험한 세상을 진짜 가서 보여주고 싶은 간절함 마저 피어났다.


그때, 그 순간의 나에겐 전부였다. 책 육아.

다섯 살 어느 무렵 친구들의 이름을 칠판에 써달라던 아이의 관심으로 시작된 한글 놀이, 그렇게 아이는 자연스럽게 줄줄줄 한글을 읽었고, 영어책도 같은 방법으로 읽기 독립을 시작했던 차였다. 이후 나도 모르게 조금씩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이제 혼자 읽을 수 있으니 두 권만 더 혼자 읽고 있어 봐.”라고 말하며 은근슬쩍 곁을 벗어났다. 이런 말을 너무 많이 했는데 그땐 몰랐다. 그 시기가 가장 중요한 몰입의 문턱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어가 제일 싫어를 외치며 유치원에 가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던 아이의 책을 읽어달라고 가지고 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도서관에 가서 만화책의 맛을 본 아이는 이후 혼자 조용해서 가보면 만화책에 푹 빠져 앉아있곤 했다.


사실 많이 지쳐있던 나는 그 순간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잠깐 조용히 있는 그 시간이 좋아서, 너무 피곤한데 책 읽어달라고 가지고 오지 않는 그 짬이 여유로워서 눈을 딱 감고 그 시간들을 모른척했다.


아이가 혼자 읽을 수 있게 되면 책 읽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럴수록 품에 끼고 더 열심히 읽어줬어야 했는데 말이다. 엄마가 읽어주던 이야기 세상에서 상상하고 즐거웠던 아이의 모습은 작아지고 혼자 읽기 쉬운 만화책의 세상으로 가고 싶은 아이의 모습만 커지기 시작했다. 그 뒤에 애써 모른 척 눈을 감아버린 일상에 지친 엄마와 함께.

다른 아이들은 영상시청만 하고 게임하겠다고 울어서 엄마와 다툰다는데 만화책도 책인데 어떠하랴. 조용히 책 읽으며 곁에 앉아있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마법천자문을 시작으로 만화책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푹 빠진 아이는 칠판에 한자를 그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지를 떠올리며 익혀서 그런지 스토리도 기억하고 엄마 아빠에게 들려줄 때도 어찌나 잘 설명을 하는지 깜빡 속아버렸다. ”학습 만화 정말 효과 좋잖아! “


심지어 마법천자문을 보더니 한자를 좋아하게 된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내내 방과 후 한자반에 신청해서 한자 급수 시험까지 보며 즐거워했다. 아이는 이후 그리스 로마신화, 내일은 실험왕, 카카오 시리즈 세계여행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만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줄글 책을 읽는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학습만화 읽기에 푹 빠진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림책과 동화책에서 멀어졌고, 줄글 동화책도 만화 읽듯이 쓱 읽는 습관이 생겨서 그림을 캡처하듯 흘려 읽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을,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목에서 핏대가 솟을 만큼 공을 들여 읽어준 시간들을 어떻게 흘려보낼까. 가혹하기도 해라.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어서 잠깐 모른척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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