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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르래 Jun 12. 2019

내 꿈은 아빠의 대리운전기사

아빠의 도시락

어제, 오늘 책방에서 아빠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별거 없지만 있을 거 다 있는 아빠의 도시락 덕분에 나는 매일 오늘 저녁은 뭐 먹지?라는 고민을 이틀간 덜게 되었고, 식비도 세이브했습니다.


아빠의 도시락 역사는 작년 나의 백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는 백수 시절 정신수련을 위해 국비로 플로리스트 수업을 들었습니다. 다만, 공짜로 수업을 듣는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장장 왕복 4시간 거리에 있는 학원을 매일같이 다녀야 했으니까요. 그곳의 사람들은 다들 도시락을 싸오기 시작해서 나도 같이 먹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늘 아침잠이 부족한 나는 도시락은커녕 학원 지각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라 나가서 사 먹곤 했지요. 나의 말을 들은 아빠는 그 길로 매일 나의 점심 도시락을 싸주었습니다.


다들 나에게 너무 부럽다

아빠에게 잘해라


했지만 나는 그것이 죄책감과 부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그것은 아빠의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아빠는 행복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기도 했지요. 나의 의견은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의 시각으로는 돈도 못 벌고 회사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딸이 뭐가 예쁘다고 그러는 걸까요?

아빠는 프리타족이 된 딸을 인정한 걸까요?

자식이란 대체 뭘까요?


가끔 자식은 부모가 원해서 태어난 존재이긴 하지만, 나는 부모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이토록 짐이 되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빠 친구 아들처럼 부모 몰래 사채를 끌어다 쓰고 빚을 진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이 정도면 가벼운 짐이라 스스로를 칭하고 싶습니다.


나는 잦은 취업과 퇴사의 반복으로 간간히 백수 생활을 보냈습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기대지 않으면 늘 돈에 기대었습니다. 돈이 없다는 건 내가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프리타인 주제에. 잘도?

돈이 없으면 귀엽고 예쁜 물건들도 살 수 없고,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갈 수도 없고,

무엇보다 집에서 도망 나와 앉아있을 카페도 없고, 친구와 밥 한 끼도 힘들었으니까요.


그때마다 나는 정신적으로 불안에 떨었습니다. 나의 사정을 알게 된 아빠는 엄마 몰래 회사 보너스로 받은 돈 중에 40만 원을 현금으로 뽑아 손에 쥐어주기도 하고, 나의 노트북이 고장 나 매일 멍하니 있는 게 안쓰럽다며 명륜동 전자상가에 가서 노트북도 사주었습니다. 아직도 아빠와 단 둘이 1200번 버스를 타고 노트북을 사러 갔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아마도 아빠와 단둘이 외출한 최초의 기억은 32살의 여름이 되겠네요. 엄마는 네가 무슨 돈이 있어 컴퓨터를 샀느냐 캐물었지만 아빠가 이것은 우리끼리의 비밀이라고 하여 내 돈으로 샀다고 거짓말했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되새겼습니다.


비록 아빠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이 바빠 자식들에게 신경을 못써주는 사람이었지만,

아침 수업이 힘들어 늦은 시간 수업을 들으러 학교를 다녔던 대학교 3학년인 나에게 야간대학 다니느라 힘들겠다고 말한 사람이었지만,

딸이 야간대학교를 다니는지 주간대학교를 다니는지 관심도 없던 사람이지만,

가족보다 친구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던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들고 주위에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나서야 가족들에게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는 모두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빠가 나에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는

우는 아이 손에 바로 쥐어줄 수 있는 달콤한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것은 아빠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아빠는 어느 날 아빠 친구와 술을 먹고 술 취한 아빠 친구를 데리러 온 아빠 친구 아들이 너무나 부러워 대학교 1학년인 나를 운전학원에 등록시켜주며 언젠간 딸에게 대리운전을 맡기겠다는 큰 꿈을 꾸었더랬습니다.

하지만 딸은 겁이 많아 운전대를 잡기는커녕 아침마다 방영되는 블랙박스 사고영상을 보고는 불안증세가 생겨 그만 운전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빠는 딸에게 운전대를 넘겨주지 못하고 오히려 딸의 운전기사를 자처하곤 하지요. 나도 이 불안증세를 극복하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나도 겨우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점은 차에 나 혼자 타야지만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직 옆에 사람이 타면 운전이 어렵습니다. 사고가 나서 나 혼자 죽는 건 괜찮지만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탄 사람들이 혹시나 다칠까 봐 불안합니다. 물론 그런 일은 잘 생기지 않는 다지만 사서 걱정하는 인간은 이런 걱정도 사서 하네요. 인생 어디까지 피곤해질 셈인지.


하루빨리 이 증세가 호전되어 아빠의 대리운전으로 할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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