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검이불루 화이불치
한 번 시작한 글쓰기, 어떻게든 마무리 짓자는 생각으로 끝까지 일기를 쓰다가 늦게 잠든 바람에 8시가 약간 넘어 일어났다.
(사실 이 글 보다가 늦게 잠들었다. 진짜 글 맛있게 쓰시는 PALEO 작가님..)
https://brunch.co.kr/brunchbook/treasure-hunter
하지만 괜찮다. 10시 넘어 일정 시작이라 아직 여유가 있다.
바깥 기온은 3도 정도. 1km 뛰기만 도달하면 금방 더워질 걸 알기에 가볍게 입고 밖을 나섰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궁남지.
백제 그 시절에는 배로 더욱 큰 규모를 자랑했다니, 이들이 진정한 문화 강국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내일도, 모레도 뛰어야 하니 딱 5km까지만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기분이 너무 좋다. 이곳이 바로 천국 아닐는지.
# 함께하면 좋을 배경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D9bBA3Zq8lY
<fill in the _. - morning _____. | nostalgic acoustic guitar for studying, reading & slow mornings>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이 부여의 궁궐 건축을 보고 적은 말이란다.
오늘을 채운 부여 관광 일정과 딱 어울리는 구절이다.
나중에 집에도 걸어놓고 싶다. 가훈으로 딱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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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부여 구시내인 규암마을 부근 마실을 나섰다.
제일 처음 방문한 곳은 ‘123사비공예마을’이었다. 오래된 농협 창고 건물을 헐지 않고 리모델링해서 만든 예술가들의 창작 공간.
저렴한 비용으로 예술가들에게 작업실과 숙소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지역민들에게는 3D 프린터 등 다양한 실용 기술들을 교육해 주는 공간이었다.
http://xn--buyeo-h09u.go.kr/html/123sabi/web/main.do?screenTp=USER
건물 앞에서는 오전 11시?부터 붕어빵을 판매한다.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청년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붕어빵이 제법 맛있던데, 앞으로도 건승을 빈다.
붕어빵과 함께 마실 음료를 사러 간 곳도 부여로 이주한 청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누가 케이크를 사 먹느냐.’는 핀잔을 듣던 어려운 시기를 벗어나 이제는 당당히 부여의 디저트 맛집으로 거듭난 카페 ‘시월’.
뾰족한 취향의 감각으로 꾸려낸 모던한 분위기와 푸르른 식물들이 기분 좋게 반기는 곳이었다.
https://www.instagram.com/siwol.b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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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올해 부여로 이주하셔서 자신의 꿈을 이루신 분의 책방으로 향했다. 이분 역시 상상위크 캠프 앞 기수에 참여했던 분으로, 부여안다 식구였다.
작지만 포근한 느낌의 책방.
둘러앉은 우리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전달해 주시는 내내 눈이 똘망똘망 빛이 나셨다. 정말 행복해 보이셨다.
하여간 부여안다는 ‘꾼’들이다.
‘너도 할 수 있어.’라며 성공적으로 정착한 멋진 청년들을 자꾸 보여준단 말이지.
보늬 사장님의 따뜻한 에너지를 느껴보시려면 보늬 책방에 방문해 보시기를 추천한다.
https://www.instagram.com/bonny_book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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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백제의 가장 큰 강’이라는 뜻의 백마강 강변으로 향했다. 날씨가 아주 그만이었다. 여기서 다 함께 자전거를 타면 참 좋을 것 같다.
부여의 신시가지(라고 해야 하나?)가 한눈에 보이는 ‘수북정’에 올라 경치를 누렸다. 크.. 좋다 좋아. 역시 사람 사는 곳은 강을 끼고 있어야 해.
내일 달리기는 이쪽으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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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본격적으로 부여 역사 문화 체험이 시작됐다.
첫 번째 코스는 백마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부소산성으로 향하는 것.
차를 타고 백마 강변에 이르니 강에 ‘누치’라는 물고기가 엄청 많더라.
사비성의 풍족함이 느껴지는 걸? 근데 고기 맛은 별로란다. ㅋ
날씨가 추웠으나 선박 내에 실내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다.
뽕짝 노래를 배경음으로 선장님의 농익은 관광 안내가 이어졌다.
‘‘바로 앞에 붉게 새겨진 한자를 보시면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낙화암….’’
낙화암에 관해 운영진이 설명해 주신 바에 따르면 ‘의자왕 3천 궁녀’ 설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 뒤 만들어낸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사실 3천의 궁녀를 유지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어렵긴 하지. 백제가 당나라도 아니고. (당나라는 4만 명이나 됐다네? 짜식들,,)
하여간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관찰자의 시선 끝에 씁쓸함이 깃드는 건별 수 없나 보다.
짧은 항해를 마치고 부소산성 뒤편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오르막 앞에는 ‘고란사’라는 절이 있다.
이 사원에는 한 번 마시면 3년이 젊어진다는 약수가 용출되고 있다. 들고 있던 텀블러에 한가득 담아 오고 싶었는데 캠프 멤버들은 관심이 없는지 스쳐 지나가시더라. (그땐 어색해서 마시고 가자고 말을 못 했다. 아, 명색이 약수 수집가인데 아쉽게 됐네.)
단풍이 한창인 부소산성을 오르다 보니 10년 전 친구들과 여행 왔을 때 사진을 찍었던 정자에 도착했다. 애증의 전 여친(?)같은 도자기. 도예를 업으로 하시는 멤버분께 부탁해서 10년 전과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구나.. 잠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부소산성 산책을 하면서 서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웃음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언덕을 함께 오르내리니 이젠 서로 퍽 가까워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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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정은 나름 손꼽아 기다리던 ‘국립 부여 박물관’이었다.
이런 지방 소도시에 국립 박물관이라? 기대감이 뿜뿜.
박물관에 도착하니 ‘백제에서놀자’라는 기업을 운영하고 계신 대표님이 직접 도슨트를 해주셔서 관람 집중도가 확 올라갔다. 이분은 사실상 ‘명예 백제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여와 백제를 사랑하고 계신 분이었다. (멋져요 선생님.)
이윽고 대망의 금동대향로를 마주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크네?’였다.
마침 평일에다가 시간도 애매한 때라 그랬는지 붐비지 않고 대표님의 설명과 함께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아니 근데 이 친구, 보면 볼수록 감동이 밀려오는 게 아니겠는가.
기단부? 의 용을 마주했을 때 느껴진 날카로움과 섬세함에 입이 벌어지다가
향 중심에 조각된 다양한 동물들,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맨 꼭대기에는 양쪽이 미묘하게 다른 날개를 휙 펼치고 있는 봉황의 모습이라니. 그것도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끝으로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백제 성왕 이야기가
일렁일렁 연기가 되어 흘러나와 좌중을 감싸도는 완벽한 마무리까지.
어떤 피아니스트는 다달이 상부 측에 조각된 악사 5인방을 보러 온다고 한다. 영감이 떠오른다나? 근데 솔직히 무슨 느낌인지 알 것도 같다.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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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떠서 선사 시대 전시품도 보고 왔다.
선사 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청동 거울, 세형동검, 대형 민무늬 토기 등이 다량 출토된 걸 보고는 ‘이곳 부여가 괜히 사람 살기 좋은 곳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주 푹 빠졌지 뭐..)
금동대향로의 여운은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까지 이어졌다.
참 대단하단 말이지.
이 정도의 관람객 밀도로 이 정도의 국가문화유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외부에서 연간 60만에 가까운 사람이 이 유물 하나를 보기 위해 모인다는 게.
문득 루브르의 모나리자가 머리에 스쳤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인증샷만 휘릭 남기고 떠날게 분명한 그것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국뽕 파이팅 대한민국 만세다
손흥민, 김연아, 봉준호, and 대향로. Let’s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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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박을 나와 마무리로 숙소 근처 정림사지로 향했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눈앞에 있다.
이야, 가까이서 보니 위용이 상당했다. 과장 좀 보태서 어떤 ‘숭고미’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오묘한 기술로 한 층 한 층 쌓아낸 인공물.
탑신부를 천천히 바라보니 각층의 비례에서 탁월감이 느껴진다.
정림사지는 부여중학교 바로 뒤에 있던데, 이 친구들은 여길 하도 많이 봐서 별 감흥도 없겠지?
부여중 졸업생이 아니어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근데 잠깐, 그러고 보니 불탑은 왜 3, 5, 7, 9, 13 같은 홀수로만 만들어지는 거지?
‘핑거 프린스 전략’을 이용해서 도예 멤버님께 물어보니
홀수로 쌓아 올리는 게 실제로 구조적 안정감이 더 낫단다.
또한 3과 5는 불교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들이라고 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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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오전은 자유 시간이라 오늘 밤엔 술을 곁들인 야식을 간단히 먹기로 했다.
그래, 수련회도 아니고 다 큰 어른들이 뭐 허허.
잘 놀고, 잘 보고, 잘 먹고, 잘 쓰고.
행복한 부여 살이 2일 차가 이렇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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