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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닐고싶어 이골이 난 돌멩이의 잃어버린 일기장

052. 사람을 느끼고 사랑을 보아요

by 한량돌

3일 차 오전은 자유시간.

여유로운 마음으로 아침 달리기를 할 수 있게 됐다.

이번엔 서쪽 백마강 방향으로 뛰어야지.

진짜 살면서 느낀 가을 중 올해가 제일 길 듯


겨울을 부르는 차가운 바람이 몸에 부딪혀도

너무나 너무나 달리기 좋은 부여 백마강변.





# 함께하면 좋을 배경 음악

https://www.youtube.com/watch?v=AC6Cyv7eDVY

<fill in the _. - once _____. | relaxing acoustic guitar music for summer’s end & autumn ev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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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읍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송정그림책마을’로 향했다.

마을 담당자님의 환대를 받으며 도착한 따뜻한 공간.

2층도 있는데 거긴 평생 낮잠 잘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간

이곳은 마을 어르신들이 직접 그리고 쓰신 동화책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단체 방문 신청을 하면 어르신 작가님들께서 자신의 동화책을 직접 읽어주시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일단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동화 마을 프로젝트의 취지와 운영 현황을 간략하게 듣고 나서 어르신 분들께서 아침부터 준비해 주신 도시락을 먹었다.

물티슈 마저도 TPO에 딱 맞네유

귀염뽀짝한 주먹밥들 속에 볶지 않은 작은 생 당근 조각의 신선한 맛이 킥이다.

가벼운 후식도 주셨다.


'이건 우리 집 감이에요. 드셔보세요.'


그래, 시골은 이런 게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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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청룡 설화가 있는 마을 초입 공터에서 본격적인 마을 탐방이 진행됐다.

쌀쌀한 날씨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가이드님을 기다린다.

곧이어 차 한 대가 서더니 대한노인회 배지를 달고 계신 멋쟁이 할아버님 한 분이 내리신다.

굉장한 ‘테토’의 향기가 느껴지는 오늘의 가이드.


그분을 따라 마을 곳곳을 누비면서 들은 얘기 중에서는 마을의 야학당 이야기가 단연 기억에 남는다.

배고픈 만큼 배움도 아쉬운 시절,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야학당.

책상도 둘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앞에 있는 사람 등에 비료 포대를 대고 연습장으로 사용하며 한글을 배우셨다는 이야기와

이런 시설이 남아있는 마을은 충청도에서도 손에 꼽는다는 이야기는

송정 그림책 마을에 대한 멋진 노신사의 애정과 자부심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뭐하는 곳인지 맞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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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따뜻했지만 코 끝은 차가웠던 날.

마을 탐방을 마친 뒤 처음 방문했던 공간에 돌아가 몸을 녹여본다.


안에는 벌써 어르신 네 분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드디어 이 마을의 백미, 어르신들의 동화책 낭독 시간이 다가온 것.


백발이 무성한 작은 체구의 할아버님이 집필하신 동화는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포근한 웃음이 아름다운 뽀글 머리 할머님의 동화는

당신의 어린 시절, 본인을 무척이나 아껴 주셨던 할머니를 소리 내어 외친다.

이들의 갈수록 가물어지는 기억을 몇 번이고 붙잡으면서.

나... 우냐....?


당최 눈물이 나지 않을 수가 있겠냐마는, 다행히도 아슬한 시점에 터지는 산책 가이드 어르신의 충청식 농담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기 부여에 와서 가슴 따뜻한 순간을 자주 만난다.

지금 이곳은 지역 이주 캠프이자, ‘마음 해동 캠프’다.


이때 앞서 소개했던 보늬 책방의 보늬님도 오셔서 베스트셀러 동화 작가님 (a.k.a. 테토남)을 영접하는 광경을 보고는 나 역시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책에 사인이라도 받으시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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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을 읽어주신 어르신들과 캠프 식구들이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체험은 끝이 났다.

이후에는 이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각자 준비한 책을 읽는 개인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이 시간을 머릿속에서 한참을 구상했던 괴물을 완성시키는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수상한 녀석 넌 뭐야 대체

작년 가을인가 대부도 둘레길 어딘가를 걷다가 발견한 버섯인데, 생김새가 귀여운 듯하면서도 요상한 것이 마음에 걸려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리고 시작된 망상.


‘이게 먹이를 유인하는 꼬리고, 이 땅 속에는 두더지 같은 괴물이 숨어서 먹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근데 이 꼬리는 또 약효가 있다는 소문이 있네?

오케이, 벨루가의 머리에 두더지의 앞 발, 몸체는 두꺼비 같은 느낌으로.. 눈은 흔적 기관만 남는게 좋겠어.’


이 놈에 대한 설정을 잡고 대충(아니 나름 진짜 열심히;;) 스케치를 해본다.

곽재식 작가님의 <한국 괴물백과>도 둘러보면서



짠!



제법 귀엽...주?


그러고 나서 우리의 친구 GPT에게 그림을 그리기를 시킨다.

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세상 참 좋아졌다.





의도했던 느낌 하고는 다르게 나왔지만.. 나름 뿌듯한 걸?

중요한 건 이 녀석을 언제 어떻게 소설 속에서 등장시킬 것인가인데..

아, 체력이 다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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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방의 인구 소멸 문제는 이런 부락 마을에서 즉-시 체감이 된다.

어르신 말씀에 의하면 마을에서 아이가 태어난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다고.

그런데 솔직하게 이런 외딴 집성촌으로 무연고자의 이주가 가능할까?

나라도 뜬금없이 살겠다고 오면 경계심부터 들 것 같은데.


그럼 앞으로 이 마을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이주인과 원주민이 자석의 같은 극이 되어 서로를 밀어내기만 한다면

내가 느낀 이 마을의 훈기는 그저 기록으로만 남겨지게 되는 걸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부풀리며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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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너-무나도 유명한 성흥산 가림성의 사랑 나무.

젊은 세대에게는 금동대향로 보다, 어쩌면 부여 보다도 유명한 곳일지 모른다.

여기가 진짜 환상적인 게, 차로 95% 까지 진입한 뒤 정말 약간만 올라가면 눈앞에 엄청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마 나무가 없었어도 유명한 장소였을 것 같다.

부여를 찾는 외지인에게 반드시 데려가야 할 장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


이 나무의 수령은 400살이라고 하는데, 직접 보면 그 이상은 되어 보인다. (누군가 안내판에 400 찍찍하고 1,500이라고 해놨던데 ㅋㅋㅋㅋㅋㅋ)

하트 모양 인증샷도 인증샷인데 나는 긴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드러난 노목의 거대하고 거친 뿌리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 오늘 왜 자꾸 울컥하니.

쓸쓸함은 가을의 남자가 쓰는 모자와 같다


여기서 보는 노을과 일출 역시 상당할 것 같다.

꼭 그 광경을 눈으로 보고 싶어.


곧 다시 돌아올게 나무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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