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독립 후 엄마와 다시 합가하며 느낀 점
'우리 집엔 내께 하나도 없네' 중학교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어느 설날 오후, 집에 돌아와 할머니한테 받은 세뱃돈을 세어보고 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할머니한테 받은 거 엄마한테 도로 줘.” 황당했던 나는 할머니가 나한테 준 돈인데 무슨 소리냐고 대들었다. 엄마는 며칠 전 할머니께 용돈을 드렸는데 할머니가 내게 세뱃돈을 주었으니, 그 돈이 사실상 본인 돈이라고 답했다. 나는 엄마가 할머니에게 드린 용돈과 내가 받은 세뱃돈이 어째서 같은 돈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엄마는 무리하게 대출받아 구매한 집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이자를 감당하고 있었다. 딸이 받은 세뱃돈이 마음 쓰일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일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집안 사정을 눈치채기에 너무 어렸다.
갖고 싶은 게 한참 많은 나이였다. 용돈을 못 받으면 내가 벌면 되는 거 아냐?라는 생각에 집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고 온 적도 있다. 그마저도 엄마는 사장님께 전화해 내가 못 나갈 거라고 통보했다. 그래서 세뱃돈으로 그 억울함이라도 달래고 싶었는데 그마저도 빼앗겼으니. 나는 엄마가 나가자마자 방문을 걸어 잠갔다. 방안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득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물건이 세뱃돈과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빼앗기려면 빼앗길 수 있는 것들. 어떤 물건은 내 이름이 쓰인 견출지가 붙어 있기도 했지만, 전부 부모님 돈으로 산 것이었다. 이곳에 진짜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께 갖고 싶다는 생각은 내께 가득한 방, 더 나아가 내께 가득한 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커졌다. 진짜 내 것을 처음 가졌던 건 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다. 시작은 화장품처럼 소소한 소모품이었다가 그다음은 옷, 그다음은 더 많은 옷을 걸 행거, 다음은 노트북으로 이어졌다. 값이 나가는 물건을 살수록 이상하게 욕심은 줄어들지 않고 더 커져만 갔다. 내께 가득한 방을 넘어 오로지 내께 가득한 더 넓은 공간을 누리고 싶어졌다.
엄마에게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건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1년쯤 했을 때다. 걱정과 달리 엄마는 생각보다 쿨했다. 네가 모아놓은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그러라고 했다. 그 당시엔 엄마가 정말 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다시 돌이켜보니, 어쩌면 엄마는 쿨한척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이 나서 미리 깔아 둔 부동산 앱을 켰다.
약 2년간의 자취생활은 내가 상상했던 대로 행복했다. 지금껏 내가 기대하고 꿈꿨던 일은 늘 예상을 빗나갔는데 자취는 달랐다. 내가 독립을 한다면? 하고 상상한 장면들이 그대로 펼쳐졌다. 비유하자면 내가 엄청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데 내가 아는 그 맛이 입안 가득 퍼질 때 느끼는 행복 같았다. 엄마와 함께 살 때라면 등짝 맞았을 비싼 원목 테이블과 무선청소기를 샀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침구를 샀고 포토카드를 여러 장 뽑아 벽에 데코를 했다. 방을 넘어 거실, 부엌, 화장실, 신발장 등 곳곳에 내 취향을 묻히는 일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행복했다.
독립을 하고 가장 즐거웠던 건 요리다.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생각하고 직접 마트에서 재료를 산다. 집에 와서 재료를 손질하고 유튜브를 보며 요리를 한다. 음식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하면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뿌듯했다. 내가 나를 위해 한 끼를 차려먹는 이 모든 과정이 특별했다. 엄마와 살 때면 요리가 늘 엄마의 몫이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내가 나를 위해 요리하는 건 전혀 다른 일처럼 와닿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그 반대였다. 스스로를 위해 요리할 필요를 못 느꼈다. 내가 독립하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엄마 집에 두고 온 내 짐을 마저 가지러 들렀다가 흠칫 놀랐다.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식재료들이 그냥 들어 있었다. 스티로폼에 랩으로 감싸진 반찬이 몇 개씩 쌓여 있는 모습은 봐도 봐도 낯설었다. 엄마는 집에 혼자 남게 된 이후로 요리를 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먹일 사람이 없는데 나 혼자 먹자고 2인분의 국을 끓이고 조림이나 볶음을 하기 부담스럽다는 거였다. 이해가 안 됐다. 나는 혼자 살아도 2인분의 요리를 해서 두 번 나눠먹었는데 엄마는 그게 왜 안된다는 걸까?
그 이유는 오래 안가 알게 됐다. 특별한 기념 거리가 없던 아무 날, 언니와 내가 엄마 집에 방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엄마는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며 우리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왔어?”라고 했다. 가스레인지 왼쪽엔 국, 오른쪽엔 프라이팬에 불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대충 봐도 엄마가 이것저것 과일을 넣고 만든 특제 양념소스로 잰 불고기다. 엄마는 요리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시에 신난 사람처럼 보였다. 옷을 갈아입으려 작은방에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부른다. “다운아 이리 와서 불고기 짠지 어떤지 간좀 봐봐” 방금 전까지 옷 좀 갈아입으라더니, 다시 간좀 보라며 보채는데 그때 엄마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엄마는 가족에게 음식을 해먹일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밥을 먹으면서도 엄마는 재잘거렸다. 우리가 오기로 한 날 며칠 전부터 재료를 사고 양념을 재 놓았다고. 이 양념에 무슨 과일이 들어갔는지 맞혀보라고. 나는 엄마가 우리에게 매일같이 아침저녁을 만들어 먹이는 게 고되고 벗어나고 싶은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물론 밥 안치는 것조차 피곤한 날도 있었겠지만, 딸들을 밥상 앞에 불러 앉히고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자기 몫을 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와 평온함을 느껴왔던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하던 사람은 그 누군가가 사라지면 다시 자기 자신을 위해 요리하기 어렵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뒤로, 엄마가 부엌에서 신난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게 그렇게 귀여우면서도 이상하게 슬펐다.
내가 독립한 지 3년 차가 되었을 때 나는 엄마에게 다시 같이 살자고 했다. 월세살이가 조금 버겁기도 했고 서로 가까운 파주, 일산에 살면서 굳이 떨어져 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었다. 엄마는 나의 제안에 오랫동안 살던 파주 임대주택에서 나왔다. 그리고 내가 일산에 구한 전셋집, 오래된 투룸 빌라에 살림을 합쳤다.
엄마와 다시 합가한 이후 생활은 예상대로 척척 흘러갔던 자취생활과 달랐다. 부모님 집을 떠나고 나만의 생활 방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이사를 준비하는 시점부터 부딪혔는데, 먼저 이삿짐을 싸는 방식부터 달랐다. 나는 그냥 짐을 옮긴다는 목적에만 충실하도록 박스에 물건을 아무렇게 담았다. 내 딴엔 나름 빈 공간을 최소화하며 알차게 정리했는데 엄마 눈엔 성이 안 찼던 걸까. 내가 담은 박스를 보며 그렇게 마구잡이로 담으면 어떡하냐며 짜증을 냈다. 이제 테이핑만 하면 되는데, 내가 담은 물건을 죄다 꺼내서 처음부터 테트 리스하듯 차곡차곡 정리했다. 엄마는 야무지게 잘 정리하는 것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다. 내가 포장한 모든 박스를 일일이 검사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내가 독립을 하기 전까지는 엄마의 생활방식이 곧 나의 생활방식이었다.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익숙했다. 그런데 내가 독립을 경험했다가 다시 엄마와 함께 살게 되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나는 청소할 때 무선청소기로 슥 돌려 끝내고, 프라이팬은 베이킹소다를 한 스푼 넣어 끓인 다음 키친타월로 닦아낸다. 빨래는 셔츠 안쪽 때가 다 안 지워지더라도 그냥 세탁기로 끝낸다. 반면 엄마는 프라이팬도 수세미로 박박 씻어야 하고, 바닥 먼지는 정전기 포를 붙인 마대로 매일 쓸어서 내게 청소 좀 제대로 하라고 보여주는 분이며, 내가 귀찮아서 손빨래하지 않은 셔츠들을 굳이 굳이 꺼내다가 손빨래를 한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가 맞다고 생각하는 생활방식이 달랐다.
각자 보기 좋다고 느끼는 가구 배치마저 달랐다. 나는 넓은 거실이 휑해 보이는 것이 싫어 소파로 가벽 느낌을 내자고 했는데 엄마는 답답한 건 질색이라며 반대했다. 심지어 내 방에 들어와 가구 배치를 잔소리하기도 했다. 미래에 살고 싶은 동네도 달랐다. 엄마는 일산에서 파주로 더 들어가 한적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직장 출퇴근 때문에 서울과 가까운 외곽에 살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지금 집의 계약이 만기 되는 때에 각자 집을 구해 따로 사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가 되면 엄마와 내가 합가 후 약 3년이 되는 때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은 그즈음인 것 같다. 처음 독립했을 때가 아니라, 엄마의 생활방식에 흡수되어 살던 내가 나만의 생활방식이 생기고 우리가 각자 지내는 게 서로에게 더 행복한 길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며칠 전 평소와 같이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점심을 먹으며 문득 조용한 집을 둘러보는데 이 집에 놓인 대부분의 물건이 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산 냉장고, 세탁기, 고급 원목 테이블, 시계, 행거, 조명, 소소하게는 식기류까지. 지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집엔 그녀의 물건이 열 개도 채 안 된다. 내가 자취한 2년 동안 하나 둘 모은 살림살이에, 엄마가 노후된 살림살이를 처분하고 흡수되듯 합가 했기 때문이다. 내 것이 가득한 방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눈 떠보니 세대주까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중학생의 내가 이런 미래를 알았다면 짜릿했을까? 세뱃돈을 뺏겨서 씩씩거리던 때의 나였다면 그랬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 상황을 그렇게 단순한 감정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 내께 하나도 없었다가 아주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엄마가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내가 한없이 의지하던 사람이 반대로 나에게 의지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