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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다운 Jan 09. 2024

낯선 출근길

중학교 때 만원 버스를 탔다가 처음으로 쓰러질뻔한 적이 있다. 사람이 가득 찬 마을버스에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데 갑자기 서 있는 게 이상하게 힘들었다. 속은 메스껍고 입은 바짝바짝 말랐다. 목적지까지 한 정거장 두 정거장을 참는 동안 증상은 더 심각해졌다. 관자놀이 옆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축구공으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눈앞이 아찔하기까지 했다. 학교 앞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정류장 의자가 코앞인데 바닥에 주저앉았다. 천식이 있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숨 쉬었다. 식은땀이 겨울바람에 닿아 추웠다.


나는 지금도 그게 정확히 왜 생기는 증상인지,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그냥 가끔 만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오는 호흡곤란이라고 설명한다. 중학교 때 이후로 1~2년에 한 번씩 불시에 호흡곤란을 겪는다. 증상은 똑같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저녁에는 한 번도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흡곤란이 왔을 때는 항상 아침에 학교나 회사를 가던 길이었다.


며칠 전 출근길에 그 증상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도 왜 갑자기 그랬는지 설명할 수 없다. 평소와 다른 점이 없기 때문이다. 딱히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고, 지하철 유동인구도 늘 경험했던 대로다. 뚝섬에서 을지로 4가까지는 괜찮다가 5호선으로 환승하고 고작 2 정류장을 이동하는 동안 느닷없이 호흡곤란이 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여 있는데 갑자기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끼고 있던 헤드폰도 답답해서 빼버렸다. 고개가 자연스럽게 땅으로 떨구어졌고 그 자세로 숨을 쉬는데 집중했다. 눈앞은 어두웠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러다 기절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회사인데 그럴 순 없다는 생각에 정신력으로 버텼다. 도착 전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버티기 힘든 상태였다. 그리고 드디어 광화문역. 나는 스크린도어가 열리자 쏟아지듯 탈출하는 사람들 틈에 썰물처럼 밀려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가는 길에 방해되지 않을 공간을 찾았다. 기둥 옆에 주저앉아 기진맥진한 상태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한 여자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정신이 없어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얼굴에 걱정하는 표정이 그려졌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애써 웃으며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그렇다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안심시켰다. 그녀는 나를 걱정하듯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3분 정도 쉬었을까. 힘없는 다리를 끌고 일어났다. 출구로 나가는 계단을 오르려는데 계단 입구에 나와 똑같이 주저앉아 고개를 땅으로 푹 떨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오늘 무슨 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슬픈 안도감도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 옆에는 방금 전 나를 걱정해 주던 여자가 있었는데, 같이 쭈그려 앉은 자세로 약을 건네주고 있었다. 무슨 약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에 찾아봤는데 아마도 공황장애 약 같다. 약을 갖고 다닐 정도면 본인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거나 가족이나 친구가 공황을 겪고 있을지 모른다.


각자의 갈길로 바쁜 서울 한복판, 정신없는 출근길에 마주한 그날 풍경은 지금까지도 여운이 남는다. 아직은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세상이 살만하다는 사실에 부쩍 위로가 된다. 그래서 그때 나처럼 주저앉아 있던 분은 괜찮아졌을까? 그 전날이나 다음날에도 출근길에 기진맥진해서 주저앉았던 사람이 몇이나 더 있었을까? 매일 아침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억누르며 출근하는 게 직장인들의 마음이라지만, 그래도 지하철이 무서워서, 버스가 무서워서 출근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날 나에게 괜찮아요?라고 물었던 사람은 알까. 매일 출근길 만원 지하철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누군가에게는 그때 그 한마디가 일터로 나아갈 용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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