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이 내게 남긴 것
고백하겠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읽는 건 잘 못 한다. 문예창작과를 나온 사람으로서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인내심이 부족해 어떤 책이든 초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지체 없이 덮어버린다. 그래서 기욤뮈소처럼 흡입력이 뛰어난 소설이나 정보성 자기계발서 위주로 책을 편식해 왔다. 심지어 자기계발서도 목차를 보고 궁금한 부분만 골라 읽었다. 최근 읽은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나에게 읽기란 '다른 세상으로의 즐거운 침잠이 아니라 붐비는 슈퍼마켓을 마구 뛰어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잡아채서 빠져나가는 행위' 그 자체였다.
책을 잘 못 읽는다는 고백이 무색하게, 나에겐 5년째 이어온 독서모임이 있다. 놀랍게도 이 모임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나다. 광고대행사 대학내일에 있을 때 입사동기 둘과 친해져서 퇴근 후 술자리를 종종 가졌다. 한 잔 두 잔 기울이는 시간이 쌓이면서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어차피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거 독서모임을 겸해보면 어떻겠냐는 가벼운 제안을 했다. 그렇게 회사 근처 맥주집에서 첫 독서모임을 가졌다. 처음엔 큰 기대가 없었다. 정해진 규칙 없이 시작하는 모임은 금방 흐지부지되는 것이 다반사니까. 그런데 그 독서모임이 50회를 맞았다.
모두가 약속을 지키는 유토피아 같은 모임은 없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에게 이 모임은 "있어"라고 답했다. 50회 동안 한 번도 책을 안 읽고 온 사람이 없다. 간혹 일이 너무 바빠 끝까지 읽지 못하고 참여하는 경우는 있어도 독서모임을 진행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준비를 해왔다. 우리는 회차가 뒤로 갈수록 서로의 책임감에 감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무임승차하는 사람 없이 모임을 이어올 수 있는지 얘기하면 늘 나오는 말이 있다. "너희 때문에 읽었어(or 독후감을 썼어)" 아름이는 내가 노션에 일찍 써놓은 독후감을 보고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모임 당일 올라온 소영이와 아름이의 독후감을 읽고 자극을 받는다. 두 사람은 늘 내가 쓴 것의 1.5배 이상의 분량으로 쓰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모임에 성의를 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영이는 가끔씩 이렇게 묻는다. "요즘에는 뭐 읽어?" 표정은 마치 '어제 환승연애 봤어?' 하며 같이 얘기하고 싶어 들뜬 친구의 얼굴 같다. 참고로 소영이는 독서 기록 어플을 활용할 정도로 애독가이자 다독가다. 해맑은 표정으로 저렇게 물을 때 나는 괜히 뜨끔하다. 독서모임을 위한 책 외에는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소영이와 아름이에게 독서가 즐거운 취미라면, 나에게 독서는 잊지 않고 챙겨 먹는 영양제다. 건강을 위해 시간 내서 하는 근력운동이다.
운동이 재밌어서 하는 사람과 필요해서 하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에게 운동을 하는 과정은 다르게 느끼겠지만, 공통적으로 얻는 결과는 같다. 건강한 몸! 50번째 독서모임을 하면서 독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소설, 에세이, 인문학, 정치/사회, 자기계발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고전작품부터 현대작품까지 시대를 넘나들었다. 시를 읽기도 하고 극본집에 도전하기도 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며 오늘날의 조립식 가족에 대해 생각했고,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각 나라마다 길이 난 모양이 왜 다른지, 학교의 정형화된 건축물이 우리의 성장과장에 끼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를 보며 문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한 뼘 넓어졌고, <나의 비거니즘 만화>를 읽으며 채식으로도 무궁무진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어떤 양형의 이유>를 읽으며 소수자의 삶을 간접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으며 앞으로 나의 생활패턴을 바꾸는 변곡점을 맞이했다.
물론 모든 책이 나에게 뻐렁칠만한 교훈을 준 것은 아니다. <세이노의 가르침>처럼 다소 아쉬운 책도 있었다. 하지만 독후감이 뚱뚱했던 책이든 아니든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 책을 한 권씩 덮을 때마다 세상을 보는 시력이 0.1 높아진 것 같다. 감히 추측해 보자면 AI시대가 오더라도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자양분은 대체불가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50권의 책은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자 앞으로도 책을 더 읽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아 스스로에게 고맙다. 마지막으로 권여선 작가의 <각각의 계절>에서 나온 사슴벌레식 문답을 빌리고 싶다. (마치 유튜버 레오제이가 "너 뭐 돼?"라고 했을 때 "응 뭐 돼"라고 대답하는 뉘앙스의 문답)
독서모임을 어떻게 꾸준히 계속해?
독서모임을 어떻게든 꾸준히 계속해.
읽기를 잘 못 하는데 어떻게 매달 책을 읽어?
읽기를 잘 못 해도 어떻게든 매달 책을 읽어.
앞으로 어떤 책을 읽을 거야?
앞으로 어떤 책이든 읽으려고.
책을 읽으면 뭐가 좋아?
책을 읽으면 뭐든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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