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투비 불안정애착유형의 자기 긍정기
작년 템플스테이를 갔을 때, 스님과의 대화에서 이런 이야길 들었다. "나는 허공이다." 내 몸은 마치 우주복이나 자전거, 오토바이처럼 탈것일 뿐이고 나는 허공이라고. 우리가 기쁘고 괴롭고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건 내가 그 감정에 붙어서 같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그 감정이 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 감정을 다른 사람 대하듯 "어 너로구나"하면서 쳐다보라고. 분리시키는 연습을 하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론적으로는 너무나도 간단명료해서 어려울 것 없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도 나는 감정을 분리하지 못하고 늘 하나가 돼서는 하늘로 솟구쳤다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감정과 나를 분리한다니, 아무리 연습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고 처음 느낀 건 2년 전에 직장내괴롭힘을 당했을 때였다. 그때 난 어떤 감정은 강하면 강할수록 신체 증상으로 이어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앉았는지 잠깐 나갔는지, 뒤통수로 낱낱이 느낄 만큼 감정이 뾰족하게 살아 있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만 해도 숨이 안 쉬어졌다. 세상 무던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누군가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열이 오르고 숨이 막혀서 자다가도 여러 번 깼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도 그랬다. 다음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 한, X를 생각하면 온갖 감정이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배신감, 미안함, 분노, 슬픔, 질투, 후회. 대부분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세계에서 나와 상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습관이 있다. 마치 <유미의 세포들>에서 웅이의 프라임세포가 유미의 세계에 들어간 것처럼. 물론 그 드라마에서는 단순히 놀러 간 개념이지 나처럼 '이사'의 개념은 아니다. 난 이사를 한다. 상대의 세계에 입주해 버린다. 그래서 헤어지고 나면 갑자기 모든 기능을 상실한 로봇처럼 삐걱거린다.
나는 불안정애착유형이다. 쉽게 설명하면 누군가와 연애할 때 애정이라는 잔고가 쉽게 바닥나는 타입이다. 안정형은 하루 한 번만 충전돼도 며칠, 길게는 몇주를 버티지만 불안형은 하루에도 몇 번을 충전해 줘야 안정을 느낀다. 그러니 헤어지면 더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일 수밖에. 내 주변에는 거의 대부분이 안정형이거나 회피형인 친구들밖에 없다. 그들에게 내 이별 후유증을 말하면 T에게 F의 감정을 느껴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이해받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그런 기대도 없다. 이십 대 후반부터는 내가 헤어지고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굳이 이야기하지 않게 됐다.
불안정애착유형은 감정에 휩쓸리기 좋은 뇌구조를 가졌다. 숨 쉬듯 불안을 느낀다. 그러다가도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쉽게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매일매일 타는 거다. 그러니 "나는 허공이야"라고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물로는 시도는 한다. 아주 미칠 것 같은 순간마다 "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지나가는 바람 같은 거야. 이 슬픔은 그냥 슬픔이야. 내가 아니야."라고. 그렇게 해도 결국 슬픔은 나한테 찰싹 붙어 떨어질 생각이 없다. 잠들려고 이불 덮는 순간까지 함께한다.
작년의 나였다면 이쯤에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는지 그간의 여러 시도들을 썼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얘길 하고 싶다. 과연 불안정애착유형이,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게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가?
최근 읽은 무라카미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그림자를 끌고서,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나이를 먹고, 그리고 죽어 가겠지. 내게는 그런 세계가 맞는 것 같아. 마음에 휘둘리고 질질 끌려가면서 살아가는 거지. 당신은 아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소설에서 그림자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라, 주인공의 마음을 투영한다. 그림자가 없어진다는 건 곧 마음이 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감정에서 해방되어 평온함을 얻지만 동시에 무료함과 공허함을 느낀다. 결국 마음이란 기쁨 뒤에 고통을 동반하지만 인간을 살아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는 걸, 하루키는 이야기한다.
아주 오래전 인상 깊게 봤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느낀 적이 있다. 해수(공효진)와 재열(조인성)이 사랑에 대해서 짤막하게 나눈 대화였다. "너도 사랑 지상주의니? 사랑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그 말에 재열은 이렇게 답한다.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돈 돼야 사랑이지."
그러니까 불안정애착유형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정에 휘둘리고 질질 끌려가며 살아가더라도 나에게는 그런 세계가 맞는 것 같다. 힘들었다 괜찮았다 하느라 삶이 조금 지치더라도 그런 굴곡진 삶의 모양이, 그 무늬가 가장 나다울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