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지 Feb 11. 2021

엄마가 숨어서 책을 본 이유

새벽에 일어나 남편이 잠자는 시간에 책을 부지런히 읽고 있는데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결혼 초기 연탄광에서 숨어서 책을 몰래 봤다고 했다. 엄마의 은신처였다. 아빠는 엄마에게 책 좀 그만 보라고 했다. 온통 책에 시간과 정신을 빼앗겨 다른 일들을 돌보지 못할 거란 걱정에서였겠다.

그래서 몰래 숨어보다가 또 들켰다.

 어린 시절에 피우는 담배도 아닌데, 왜 숨어야 하고 왜 들켜야 하는지. 아마 농사일이 쌓여있고, 소와 염소들 밥도 주고, 어머님을 챙기고, 세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농부의 일상에 책을 보는 여유란 사치였을지 모른다.

엄마는 책을 보는 걸 그만뒀다. 대신 우리에게 책을 사줬다. 아빠 몰래 12개월 할부로 산 오십만 원짜리 과학 만화 전집이었다. 너무 재미있어 닳고 닳도록 책을 보았다.


엄마가 숨어서 책을 봤다고 한 일들은 나이가 좀 먹고 나서 어린 시절의 여러 해프닝들처럼 안줏거리로 종종 테이블에 올랐다. 어떤 별것 아닌 해프닝들로 이야기했던 게 지금 생각난 이유는 뭘까.

엄마는 아들과 두 쌍둥이를 키우고, 남편과 어머니를 챙기는 사이 자신을 잃어가는 게 두렵지 않았을까. 엄마가 마치 숨어서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먹다 들켰다와 동격은 아닐 텐데 그런 식으로 종종 이야기는 소비됐다.

함께해야 하는 삶 속에서 자칫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다. 나는 오히려 혼자 살면서 시간이 많았던 때보다 지금 틈을 내 책을 더 많이 읽는다. 그때는 모든 시선이 외부로 향했지만 요즘은 자연스레 내부로 향한다. 사춘기 시절에도 해보지 않던 존재의 물음에 대한 질문도 자주 한다.


결혼을 하면서 일상이 큰 변동 없이 흘러가면서 여유가 생긴 걸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그러는 걸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사실은 책을 통해 지난날들을 돌아보고 비로소 나에 대해 여러 질문을 해보는 시간이 생긴 것이었다.

이제 엄마는 책을 잘 보지 못한다. 노안 때문이다. 안구건조도 심해져서 책을 가져다 드려도 안경을 쓰고 읽다가 금세 내려놓는다. 그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어쩐지 좀 허전해진다.


엄마의 직장은 곧 집이다. 농사 지으러 집 앞마당에 가서 일하는 엄마는 늘 아침에 곱게 화장을 했다. 생활인이 되느라 자신을 덜 돌본 어머니는 언젠가 화장을 하며 무심히 내 물음에 답했다.

“엄마 어차피 집에서 일하는데 왜 화장해? 나라면 귀찮아서 안 하겠다.”

“엄마는 화장해야 거울이라도 보지. 하루 중에 내 얼굴 볼 시간이 없지 않냐. 이렇게라도 내 얼굴 보는 거야.”


세 아이 엄마로 며느리로 남편의 이름으로 살아오는 동안 본인의 얼굴을 잊을까 엄마는 부단히 거울을 보며 아침에 매무새를 단정히 했을지 모른다. 거울을 보는 건 얼굴을 보는 것이었고, 얼굴을 보는 일은 하루에 적어도 한 번 며느리의 모습도, 아내의 모습도 하닌 본인의 모습을 인지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책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엄마의 마음들을 아침에 조용히 일어나 책을 읽으며 천천히 생각한다.

나는 조금 아빠 바라기였다. 늘 아빠를 조금씩 더 안쓰럽게 생각해왔었는데 요즈음은 늘 묵묵히 일하던 엄마에게 자주 마음이 쓰인다. 그 안에서 자꾸 조금씩 내 모습이 보여서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족을 꾸리고 있지만 내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해 그렇게 나도 책을 보고 거울을 본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매거진의 이전글 눈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마음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