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지 Jan 11. 2021

눈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마음으로

눈사람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포근한 사람이었느냐

그야말로 폭설이다. 퇴근길에는 진눈깨비 하나 내리지 않더니, 채 두 시간도 안돼 창밖엔 온통 눈 세상이다. 한파까지 겹쳐 오가는 사람들 없는 아파트 앞 주차장에는 하얗게 눈이 내렸다. 도심에서 발자국 없는 하얀 눈을, 흙먼지 묻지 않은 새하얀 눈을 만질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없다. 추운 계절을 싫어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낭만이 바로 ‘눈 오는 날’이다. 다음날 출근길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눈이 올때면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자꾸 창밖만 보게 된다.      

“얼른 옷 챙겨 입어! 우리 나가자!”

남편에게 재촉하며 말했다. 잠깐 눈을 보러 나가는 거지만 방심하면 안됐다. 날씨가 영하 12도다. 우리는 모자와 장갑, 긴 양말과 두터운 외투로 무장하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신발을 덮을 정도로 눈이 소복이 쌓였다. 남편은 서슴없이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눈사람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방금 내려 잘 뭉쳐지지 않는 솜사탕 같은 눈을 꼭꼭 뭉쳤다가, 살살 굴렸다가를 반복했다. 주차장 눈을 전부 뭉쳐갈 기세로 남편은 금세 몸통을 만들었고, 머리 부분 만들기에 실패한 나는 남편과 눈덩이를 바꿔가며 눈사람을 만들었다. 나뭇가지로 팔도 붙여주고, 눈과 입도 붙여주었다. 웃고 있는 눈사람을 보니 왠지 뿌듯했다.  

    

그 후로 나는 자주 창문을 내다봤다. 다음날 혹시 눈사람이 녹아 없어졌을지, 누군가 주차를 하다가 눈사람을 치거나, 혹여 부숴버리진 않았는지 내심 걱정됐다. 눈사람에게 영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눈보라를 맞으며 만든 눈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애정이 생겼다. 아파트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눈사람 머리가 내려다 보였다. ‘그래, 아직 잘 있구나.’     


며칠 뒤, 장을 보러 밖으로 나왔는데 여전히 눈사람이 서있었다. 그런데 어디가 좀 달라져 있었다. 눈사람이 오히려 더 커진거다. 몸통은 더 단단하고, 가분수였던 눈사람이 비율도 좋아진 것이다. 눈도 바뀌었다. 돌멩이로 누가 눈을 채워 둔 것 같았다. 그 사이에 나뭇가지로 만든 눈사람의 눈이 떨어졌었나 보다. 살짝 무섭게 성형을 했지만, 입은 웃고 있으니 다행이다. 눈사람은 진화를 거듭했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누군가 만든 눈사람을 보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눈이 녹지 않는 한 눈사람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을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비포(좌) | 애프터(우)

눈사람이 녹지 않길 바라는 마음은 따뜻하다. 아버지는 눈이 내린 날이면, 어린 내가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어 눈 쌓인 하얀 마당을 선물했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 쌓인 마당에서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한기가 느껴졌는데, 오히려 마음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내가 발자국 없는 하얀 풍경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는 마당에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만의 눈 치우기이자 눈 오는 날의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면, 내 키 만한 눈사람이 마당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마당에서 눈사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가만히 생각난다. 아버지는 눈사람을 한참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가서는 기울어진 머리를 일으켜 세우셨다. 언젠가는 녹을 테지만, 눈사람을 지켜내는 마음은, 눈사람에 대한 마음 그 이상이었다. 나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늘 그랬으니까. 내가 기울어질 때면, 아버지는 조용히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가수 이적 씨가 SNS에 ‘눈사람’이라는 글을 올렸다. 남이 만든 눈사람을 마구 부순 사람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눈사람을 부순 남자 친구의 폭력성에 결별을 결심한 여자 친구의 이야기였다. 글에 따르면, 여자 친구가 이별을 결심한 이유는 아무렇지 않게 눈사람을 부수고, 즐거워하는 남자의 모습 때문이었다. 결국, 그 폭력성이 자신을 향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안도현 시인은 그의 시에서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고 말했다. 차디찬 눈사람이지만, 사람들에겐 따뜻한 미소를 짓게 하는 눈사람이다. 누군가 다시 눈을 붙이고, 눈사람의 몸을 일으켜 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들어있다. 그 마음은 눈사람에서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눈사람이 잘 있는지, 또 한 번 창밖을 내다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