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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Apr 08. 2021

우리는 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는가?

커뮤니케이션 학도, '공간'으로서의 사명

책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당신을 위하여' 中

'01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사람의 사명 _ 이상길'을 읽고,



    고대 그리스에는 아고라, 프랑스에는 살롱,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명동 싸롱(살롱)과 다방이 존재했다. 이들의 공통적인 목적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었다. 다양한 계층과 직업을 가진 이들이 모여 한계 없는 대화를 나눴던 ‘공간’이었다. 이를 통해 철학, 문화 등이 활발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에게 ‘공간’의 의미는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저자가 ‘커뮤니케이션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고르기아스』를 언급한 것도 그 이유이다. 플라톤의 여느 대화편처럼 소크라테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대화 상황을 『고르기아스』에서 주로 담고 있다. 저자는 다른 것들보다 이러한 대화에 집중했다. 폭력 대신 말을 선택한 그리스인들의, 개인의 이해타산이 담긴 의견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과 적절한 대답이 끝없이 이어지는 진실한 대결로서의 대화에 말이다.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대부분 아고라에서 이뤄진다. 그는 민회에 가는 대신 아고라에 나갔고, 외국인, 여성, 노예 등 시민에게 말을 걸어 문답에 끌어들였다. 이에 아고라는 의견이 아닌 대화가 존재하는 민주주의적 ‘공간’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물리적 폭력이 가장 큰 권력으로 회귀되던 고대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지적인 행위가 그곳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해당 시대에서 힘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즉, 소크라테스는 공간을 통해 그의 이상을 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고대 그리스와 소크라테스를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힘의 논리는 물리적인 폭력에서 벗어나 상당히 다층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부르디외의 『말하기의 의미』는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이 쌓아 온 ‘언어 대 폭력’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이 소용없다고 이야기한다. 상징권력 또는 상징폭력이 그를 정확히 표현한다. 이것은 물리적 힘이 아닌, 자본과 지식이 권력으로 그 가치를 부여받으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두 개의 층으로 나눠졌던 위계가 세분화되었다는 것이다. 세분화된 위계는 물리적인 힘과 같이 명백히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묘하게 우리와 함께 공존한다. 특히, 정보와 지식은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 권력이며, 특수한 차별화로 귀결된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정보와 지식을 언어로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 간 격차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된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민주주의적 대화로서의 언어와 상당히 다르며, 오히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경계하던 폭력과 닮아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격차를 줄여야 한다.


격차를 줄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대화를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아고라, 살롱, 다방에서 일어난 물결처럼 다양한 각기 계층들과의 서슴없이, 끊임없는 대화를 말이다. 대화가 없는 언어는 위계를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부르디외가 비판하는 ‘통념의 전문가’들이 이를 포괄하고 있다(사물의 본질에 대한 참된 앎과는 상관없이 말로서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을 ‘통념의 전문가’라고 언급한다).


대화는 이들을 경계하고, 인간의 보편적인 이성을 맞춰갈 수 있는 채널이 된다. 권력 격차를 없애는데 적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이 ‘언어 대 폭력’으로 구분지은 것과 비슷하게 ‘언어 대 대화’로 구별하여 경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언어를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자는 말은 아니다. 대화를 지향하자는 것이고, 폭력을 지양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아닌 대화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커뮤니케이션 학도가 해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대화는 끊임없는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상대방과 나를 이을 매개가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매개를 ‘공간’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공간은 활용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를 대화의 공간으로 바로잡아 줄, 형성해 줄 주체가 필요하다. 커뮤니케이션 학도들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배우고, 그를 통해 성장과 발전을 이룩할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질 향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대화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사명의식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화를 위한 공간은 꼭 물리적인 것이 아니어도 된다. 실제로 물리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는데 그 예로 인터넷이 있다. 인터넷은 거대한 정보들의 연속적인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다시 말해 아고라와 같은 가시적인 공간들처럼 각기 계층의 사람들, 다양한 주제가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별적으로 정보를 취득하고, 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커뮤니케이션 학도들은 이때 양질의 정보를 다양한 위계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이에 대한 건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터넷을 직접적으로 창조해내는 이공계적인 노력이라기보다 그들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자양분을 마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처럼 대화를 위한 공간의 의미는 시간과 배경에 따라 변화해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은 공론장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위계가 세분화되어 왔다고 한들 소통의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론장의 공간 또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 안에는 커뮤니케이션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발전시키려는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의 노력이 충분히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들은 명동 싸롱에서 시작하여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공간 안에서 소통과 토론을 통한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 노력은 일제강점기, 언론통폐합, 촛불시위 등의 고난이 있을 때에도 공간으로 존재하며, 사람들 간 토론과 논쟁을 지속시켜 왔다. 결과는 항상 민주주의적 절차로 이어졌다. 다시 말하면, 공간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위계가 섞인 불평등한 언어가 발생할 때 상대적 약자인 사람들, 국민들이 불평등하다고 외칠 수 있는 창구가 된다. 언어의 모순을 언어라는 채널로 해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한 언어는 한 뼘 더 자란체로, 새로운 모습의 대화로 공간에 자리 잡게 된다.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은 공간을 마련해줌과 동시에 상대적 약자들을 보호하고, 자생력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소명을 가진다면 사람들의 대화를 원활히 할 수 있는 공간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물리적인 공간이 일그러지고 비가시적인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다면, 공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인터넷 상에서 위계적인 언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것 또한 공간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공간은 어려운 개념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같이 끊임없는 의견 공유를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소통)을 한다는 것은 의견의 독백이 아닌 상호교환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 해 온 대화와 공간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나아가 커뮤니케이션은 한 계층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끝까지 이것을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을 익히는 사람들은 경계하고 조심하는 방법조차 언어를 통한 것이라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그것이 공간을 만드는, 공간이 되는 사람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학가 이상은 커뮤니케이션 학도로서 위계적 언어를 경계하기 위해 다방을 여러 차례 운영해왔다. 이것은 사업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문인들의 모임 장소로 곧잘 이용되며, 우리나라 고유의 문학 등을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상은 이러한 문인들이 다방에 방문하는 것을 두고, “심정의 회유를 소원하는 티 없는 사람의 하나가 된다.”고 묘사를 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서 대화를 한 이유, 혹은 우리가 공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유를 그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의견으로 남지 않고, 이를 영원히 의심하고 발전시키는 순수한 커뮤니케이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심정의 회유를 무서워하지 않고, 소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학도로서는 공간을 세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 체계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길이며, 오랫동안 바뀌지 않은 가치를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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