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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Dec 23. 2021

영화 ‘어디갔어, 버나뎃’ 리뷰

모든 사람은 맘대로 안 될 때 예민하다


영화의 원제는 ‘Where’d you go, Bernadette’이다. 당연하게 Where ‘did’ you go의 축약형이겠지 하면서도, 영화를 보고 나서는 Where ‘would’ you go의 축약형일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둘 다 내포하는 의미라면 더 멋있을 거고 말이다. “과거의 의미를 가지고, 앞으로 어디로 갈 건지를 자의적으로 선택하겠다”는 그런 버나뎃의 성장기 영화 같이 말이다.


물론 성장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상 이 영화는 모든 이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무슨 영화인들 안 그렇겠냐먀는.


버나뎃은 예술가다. 건축가. 그러나 한 번의 실패와 함께, 가정을 이끌어가면서 본인이 무너지게 된다. 사실 무너진다는 표현도 좀 그렇다. 왜냐하면 극중에서 버나뎃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잃어본 적은 없다. 이게 이 영화의 매력인데, 버나뎃이 극심한 불안증과 우울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이해하게 만든다. 버나뎃의 그 복잡미묘한 감정선을 건드리는 멜랑콜리함은 절대 아니다. 상황을 단순 나열하면서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의 예민함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극중 하나의 예시로, 버나뎃의 남편 엘진이 심리상담사에게 버나뎃이 이웃을 차로 쳤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 장면이 있다. 그 전에 감독은 버나뎃이 이웃을 차로 치지 않았으며, 전혀 우울과는 상관없었던 일임을 보여준다. 이런 것처럼 영화는 감정선을 휘몰아치듯 건드리지 않는다. 장면들의 단순 나열을 통해 버나뎃의 불안정한 상황을, 그리고 그로 발생한 문제 상황을 보여준다.


모든 현실에서 그렇듯이, 불안정함이 발현하는 데에는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 영화에서는 이 본질적인 원인을 무겁지 않게, 독창적으로 다룬다. 그게 영화의 주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버나뎃과 엘진이 각각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장면을 교차 편집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원인을 규명한다. 장면이 지나간 후, 나는 그렇지, 원인은 언제나 잠재적으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고, 그걸 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 그게 사는 거지 하고 느끼게 된다.


말이 길어졌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요는. 버나뎃이 예술가여서 예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회의 악이 되지 말고, 무언가를 크리에이트 해라. 버나뎃의 친구가 해준 말이고, 버나뎃은 참 영화스럽게 그 말을 영화 후반부에 떠올리며 되뇐다. ‘사회의 악’, ‘크리에이트’ 이 두 가지 모두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 번째로, 사회의 악. 우리 모두 예민하면 사회의 악이 되곤 한다. 내 자신에게, 가정에서, 그리고 진짜 사회까지 넓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당장 점심 메뉴 선택 하나도 내 맘대로 안 되면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이 이상의 일에는 더더욱이 그럴 거고. 이건 언제나 트러블의 씨앗이 되고, 결국 나는 (버나뎃이 그렇게 됐던 것처럼) 정신 과민으로 몰리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크리에이트를 해야 한다. 무언가를 손으로 조잡하게 만들라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사실 정확한 의미로 규정짓기에는 애매하기도 하다. 다만,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에는 끊임없는 확신이 든다. 개인정비 시간을 말이다. 내 머릿속으로 번뜩이는 생각을 할 때까지. 그러고 나서 그 번뜩이는 생각이 뭐든지 간에, 남에게 해를 안 끼치는 선에서, 무조건 그대로 행해야 한다.


이 두 가지 포인트에 꽂힌 건 나를 위한 조언을 크리에이트 하기 위해서였다. 스파크가 튀면 바로 글을 적던, 진짜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던 나는 꽤나 현실에 무뎌진 채로 살았다 요 근래. 바쁜 것도 팩트였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느끼는 모든 새로운 감정과 생각들이 흔한 것으로 느껴졌다. 내가 유별나게 그것들을 취급하면 안 되는 느낌이 꽤나 강렬하게 들었다. 그래도 몇 살 좀 먹었다고 이런 건가 싶기도 한데. 그렇다고 이게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기에 개성이 꽤나 강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를 두드려서 둥글게 얼버무린 채로 살아가는 게 맞다고 해도, 내 개인만의 시간, 내가 원하는 생각을 크리에이트 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했다. 그래야 나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 사회에서 악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니까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라고도 또 이해하게 되었다. 그냥 뭐 사회에서 내 역할 어쩌구를 떠나고서도, 내 범위-각자의 영역 내에서 생각보다 예민해지기 쉽다. 오히려 각자의 영역에서는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결혼한 부부 영역 사이에서 이 예민함이 극대화 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둘을 위해 각자의 크리에이티브를 뭉개서 살아가는 것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이것에서 오는 필연적인 어떤 그런, 스트레스들을 해소할 방안도 떠올려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면 방안이 뭐 따로 있겠는가. 어떠한 크리에이트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겠지.


근데 여기서 진짜 진짜 중요한 것은, “그동안 무디게 생각했던, 예민하지 않았던 부분들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유별나게 생각해도 되는 어떤 그런 영역을 새로 만들어서 자기의 다른 영역들과 적당히 조율을 해야 잘 살아가지 않을까. 그런 뭐 애매모호한 말.


이러나 저러나 나는 오랜만에 크리에이티브와 스파크를 맞이하고자 하는 오픈 마인드를 가지게 되었다. 연말이라 더 그런 걸지도. 뭐라도 만들어야지. 그래야지. 개인이 살아야 사회가 산다는 말이 하고 싶었는지도. 그냥 다들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여유 정도는 가지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얼마나 좋으려나.


마지막으로, 케이트 블란쳇.

케이트 블란쳇을 좋아하는 데 어디 이유가 있겠나. 꽤나 고정적인 역할만 할 것 같은 모양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들에는 매번 다채로움이 묻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캐릭터가 상이하게 다르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영화 ‘블루 재스민’에서 볼 수 있었다. 온통 땀에 젖은 블라우스를 입고 걸어 다니던 그 모습. 꿈도 없고, 자아도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던 케이트 블란쳇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정반대로 자아 뚜렷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어딘가 모를 유사함을 느꼈다. 그건 아마도 케이트 블란쳇이 독백 연기를 할 때 나오는 에너지 때문인 걸로 추정되는데. 비슷해서 불호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극호에 가까웠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집중력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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