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사(獻辭) : 축하하거나 찬양하는 뜻으로 바치는 글
빠더너스라는 유튜버 집단을 좋아한다. 특히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 시리즈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문상훈과 유병재가 스스로 취향을 속이게 되는 ‘척’에 대해 논한 것에 꽂히게 됐다.
아마 내 찌질함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나의 사람들에게 일차원적인 것 말고, 어떤 정신적인 찌질함을 이야기하는 과정을 심도 있게 고민했다.
마냥 솔직한 성격이라 그런 이야기가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오히려 편지 적을 때 예쁜 말을 쓰려고 아등바등 하던 내 옛 모습과 참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개가 배를 뒤집어 까- 자신의 취약한 면을 서스럼 없이 보여주는 것처럼-
내 가장 연약한 감정을- 속살을- 공유하려는 거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애정에 기반한 행동이란 것이다.
한 때는 내 감정 부풀어 오른 채로 (나조차 내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상대방에게 드라마 감상문 읊듯 발설한 적도 있었고,
또 다른 때에는 감정을 내뱉는 것 자체가 자의식 과잉 같아 아무 말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미지근한 온도로- 어쩌면 유머에 가깝게 내 애정을 표현하게 됐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한테는 정신적인 찌질함과 동시에, 다가올 생일 등을 대비해서 편지에 예쁜 말들을 꾹꾹 담고자 한다.
뭐가 어찌돼든, 내가 뭘 하든 단단히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애매한 사람들 속에서 우스꽝스러운(과장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삶을 리셋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이유가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헌사를 적는다.
시간이 훨 지나도, 나에게 내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름과 푸름에 담겨있을 거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청춘이라고들 하겠지. 청춘도 좋은 말이다.)
나는 그들이 더 멋진 사람이 되길 원하는데, 그 말인즉슨 더 이상적인 사람이 되길 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로망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해서, 내가 더 멋진 사람이 돼야지. 더 힘차게 살아가야지.
이 느슨하지만 열정적임을 만들어내는 관계들을 사랑한다.
문상훈과 유병재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은 왜인지 자기 취향을 속이는 찌질함이 있다.
그래서 그런가. 요새는 오히려 한창 유행인 것들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당당해 보인다.
물론, 동시에 미디어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한다만.
근데 내 진짜 솔직한 말로, 그들이 당당해 보이는 이유는 ‘보편적인 걸 좋아하는 게 찌질해 보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느끼는 거지. 아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굳이 특별해 보이고 싶지 않구나. 그들에게서는 그런 것들이 다 무용하다.
새삼 고맙게 당연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또 당연한 얘기하자면, 사랑은 보편적이지만 행하는 사람들 간에는 참 특별한 것이니, 그렇게 사랑 노래들이 천지인 걸거다.
이렇듯 사람은 쉽게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자고로 내 인생 지론이다.
어디서나 정신적 든든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중요한데, 그건 정말 사람이 사람을 믿으려고 애써야 (어쩌면 척이라도 해야) 나올 수 있는 거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내뱉는 그들에 대한 내 애정은 실제로는 그렇게 드라마틱 하지는 않다. 오히려 무심하게 보일 수도.
근데 무탈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깨닫는 요즘이라, 그들에 대한 고마움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냥 그래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겸허히 헌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