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더 버쳐, 현대미술과 사회적 질문을 위한 전시공간
after the butcher, Ausstellungsraum fuer zeitgenoessische Kunst und soziale Fragen
주소 Spittastrasse 25, 10317 Berlin
대표 Thomas Kilpper, Franziska Boehmer
독일에 잠시라도 거주했던 사람은 한 동안 '약속문화'에 시달린다. 한국에서는 병원이든 미용실이든 자신이 원할 때 찾아가서 기다리면 되었지만, 이곳에선 미리 전화를 하여 시간 약속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지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땀을 빼는 일이다. 그런데 약속을 잡고 가야 하는 전시공간이 있었다. 왜냐하면 상주하는 직원이 없기 때문이다. 2019년 초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최선아 작가(1968~, 부산)의 전시를 취재하기 위해 방문한 애프터 더 버쳐는 영문으로 하자면 artist-run space, 즉 예술가가 전시를 기획하는 대안공간이다. 전시공간 방문 문의에 대한 빠르고 친절한 답장이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방문 자체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누군가 전시장에 온다고 하면 작가에게 연락이 간다는 것이었다.
애프터 더 버쳐, 현대미술과 사회적 질문을 위한 전시공간은 예술가인 토마스 킬퍼 Thomas Kilpper와 교사로 일하는 프란치스카 뵈머 Franziska Boehmer가 2006년부터 과거에는 정육점이었던 그들의 집에서 운영해오고 있다. 갤러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 동베를린 지역의 한산한 거주지, 슈피타슈트라세 25번지에 위치한 이 작은 건물은 1870년에서 1875년 사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시멘트 건물 중 하나였다. 당시 이곳엔 지금까지도 빅토리아슈타트 Viktoriastadt라고 불리는 작은 거주지역이 형성되었는데 슬래그시멘트로 만들어진 60채가량의 주거용 건물이 지어졌다.
슬래그는 금속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서 이것을 시멘트와 혼합하여 재활용한다. 놀라운 것은 이 재활용 재료가 절연, 방음, 방열, 보온 등 건축자재로서 놀라운 물리적 특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빅토리아슈타트는 지속 가능하고 친환경적인 건축의 꽤 이른 실험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현재는 그때 지어진 집 중 여섯 채만 남아 있으며 이례적인 건축공법으로 인해 기념물로 보호되고 있다. 1960년대 이 집의 1층이 정육점과 저장소로 개조되었고 길 쪽으로 가게의 문과 두 개의 큰 창문을 내었다. 구동독 DDR 시절 한 때는 15명의 직원이 일했으며 매주 20톤가량의 육류를 가공할 정도로 큰 규모의 정육점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 건물은 비워졌다.
이제 애프터 더 버쳐는 예술가를 위한 예술가들의 프로젝트 공간이다. 공간의 공동 운영자인 킬퍼와 뵈머는 연결점이 희미한 두 작가를 한 공간에서 만나게 하고, 작가들이 직접 그 충돌을 다뤄가며 기획하게 한다. 작가들의 작업은 비상업적인 조건 속에서 소개되며, 주로 사회적 질문과 저항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다룬다. 뵈머는 에프터 더 버쳐가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비영리 아트스페이스가 되었다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리를 추구하는 상업 갤러리가 점령하고 있는 베를린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150년 동안 그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는 재활용 건축자재처럼, 지난 15년간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예술가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과거 정육점이었던 오래되고 작은 공간 안에 녹아 있는 예술가들의 고민의 흔적은, 여러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경험하는 갈등과 번민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자료출처:
www.after-the-butcher.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