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2동
봉천8동 골목길을 떠나는 날엔 비가 왔다. 아버지는 그 사이 남대문 이불 시장을 떠나 작은 아버지, 고모부와 함께 중장비 회사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사업이 제법 잘 되었었는지 일하시는 데 필요한 1톤 트럭과 승용차를 사셨다. 나는 그 두 가지 만으로도 이미 신이 났다.
우리의 다음 집은 신림2동 큰 길가에 있었다. 큰 저택 아래층 반지하 집이었지만 집 바로 앞에 주인집 정원이 있어 마치 내가 그 정원의 주인인 것 같았다. 차고가 있는 것도 트럭을 가지신 아버지께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높은 문턱 없이 이어진 두 개의 큰 방을 처음 보았을 때 드디어 뛰어다닐 수 있는 집이 생겼다고 내심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정원과 집 사이의 긴 마루는 춥지 않은 날엔 나에게 또 하나의 방이 되어 주었다.
확실히 그때 아버지는 수입이 괜찮았나 보다. 누나는 피아노와 미술을 배우고 있었고 보습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나도 누나를 따라 미술학원을 다녔다. 내가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던 아버지는 한문을 배워야 한다면서 서예학원에도 보내셨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누나는 진득하니 잘했다. 청소년 시절 누나의 꿈이 한결같이 교사였던 것을 생각하면 배움에 대한 즐거움을 일찍부터 알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어 남매는 이런 대화를 했다.
“나는 네가 뭐든 쉽게 해서 부러웠어.”
“나는 누나가 어떻게 그렇게 책을 오래 보는지 신기했는데.”
흔히 쓰는 말로 누나는 노력파, 나는 적당히 해도 중간은 가는 아이였다. 부모 입장이 되어보니 재능이 많은 자녀보다 노력하는 자녀에게 더 많은 애정이 가는 법이더라. 우리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누나의 공부환경에 더 많은 정성을 들였다.
누나가 공부에 쏟아야 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남동생에게 할 일이 생겼다. 학원이 늦게 끝나는 날이면 누나를 데리러 가는 것. 나는 기꺼이 누나의 에스코트를 맡았다. 사실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이 무슨 보호자 노릇을 할 수 있겠냐마는, 어머니는 그래도 여자 아이 혼자보다는 어린 남자애라도 같이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길이 엇갈리지 않으려고 나는 누나의 학원이 끝나는 시간보다 일찍 갔다. 해가 져서 이미 어둑한 저녁, 학원 근처 놀이터가 딸려 있는 어린이집 정글짐에 매달려 누나를 기다리곤 했다.
우리 집에서 누나의 학원으로 가는 길엔 긴 계단길이 하나 있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 가늠해 볼 때에도 꽤 길었다. 누나를 데리러 가는 방향에선 내리막길이어서 괜찮았지만 돌아오는 중에는 가장 어려운 코스였다. 그날은 비가 왔다. 평소처럼 누나를 만나 우산을 쓰고 오는데, 계단길을 끝까지 다 올라왔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우산이 뒤집어졌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산은 내 손을 떠나 계단 저 아래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우산을 가지러 가는 일은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만약 우산이 뒤집어지지 않았고 내가 우산을 너무 꽉 붙잡고 있었다면. 작고 말랐던 나는 우산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나가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강한 것만이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꺾여야만 내가 보호하는 대상이 꺾이지 않고, 내가 피를 흘려야만 그가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다.
나와 누나는 가족 안에서 참 많은 일을 겪었다. 그때마다 누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고집스러웠나 보다. 아니면 내가 다치기 싫어서 너무 빨리 몸을 사렸던가. 내가 꺾이고 다쳤어야 오히려 누나가 다치지 않았을 텐데. 마흔을 앞둔 아저씨가 뒤집어진 우산한테 한 수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