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봉천동
내 기억 속 첫 집은 작은 골목길에 있었다. 봉천8동 쑥고개 시장에서 신림동으로 넘어가는 길목, 작은 골목길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주변엔 내 또래의 작은 아이들이 두어 명 있었던 것 같다. 그 길의 특징이라 할 것은 마름모 꼴의 아이 몸통만 한 돌을 박아 넣고 그 사이사이를 시멘트로 메워놓은 구조의 담벼락이다. 기억 속에서는 넓게 느껴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들이 대게 그렇듯 이 장면도 빛바랜 컬러사진 같다. 대략 계산해보면 내 나이는 두세 살, 그럼 아버지가 해외 근로자로 나가 계실 때였다. 남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던 어머니는 꽤나 고단하셨을게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아 있는 이 시절 누나와 나의 모습은 볼이 빨갛게 부르튼 귀여운 아이들이었고, 밝게 웃는 표정 속엔 그늘이 없다. 지금 네 살인 둘째 아이를 생각해보면 아마 그때의 나에게도 슬픔이나 외로움에 시간 쓸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 장면 속 그나마 구체적인 사건 중 하나는 골목길 담벼락에 쓸려 다친 손이다. 아이들과 놀이를 하다 그랬는지 아니면 그 담벼락을 올라 보려다 미끄러졌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래, 아팠다. 어쩌면 그 통증 때문에 그 몇 초가 다른 수많은 기억들을 제치고 살아남았나 보다. 찬란하고 행복했던 기억도 물론 의식과 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지만 결국 우리 삶을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며 귀띔하는 건 아팠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린 시절 첫 기억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이유는 상처 위로 내리쬐던 햇살 때문이다.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늦은 오후 주황을 띄는 노란빛은 유난히 찬 내 손을 잡아 주는 따뜻한 아내의 손 같았다.
햇빛은 나에게 상처의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는지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내 작았던 손 위를 따뜻하게 보듬어준 것뿐이었다. 그 기억과 시간적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런 따뜻함이 소중해진다. 나의 아픔을 묻지도, 그 아픔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말로 떠들어대지 않고 옆을 지켜 주는 따뜻함. 나의 존재가 내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런 기억이고 싶다면 이제 와서 너무 늦어버린 바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