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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재 Sep 22. 2021

당신의 그래비티는 무엇인가요

영화 <그래비티>를 읽다

*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생존, 그리고 생명

'생존'과 '생명'은 엄연히 다르다. '생존'은 살아남는 것, 즉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때문에 '생존'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은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다.


반면 '생명'은 살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다. 때문에 '생명'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에 비견될 정도의 동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흔히 말하는 '삶의 이유', 즉 중력(Gravity)이다.



영화 <그래비티>를 한 줄로 요약하면 주인공이 우주에서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삶의 이유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영화 초반 라이언 박사에게는 삶의 이유라는 것이 없다. 4살 난 딸이 사고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인생은 (영화 속 그의 표현처럼) '그저 운전의 연속'이다. 딸의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 그는 운전 중이었고, 그의 시간은 그 지점에 멈춰 버렸다. 이제 지구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주에서 정처 없이 유영을 하는 그는 이미 지구에서부터 정처 없이 운전을 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에게 지구와 우주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신형철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가 흔히 '삶의 의미'(중력)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그녀에게는 딱히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무중력 공간인 우주에 오기 전에 이미 그녀는 무중력의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207p


때문에 사고가 발생한 직후 우주미아가 될 뻔한 그를 구한 건 그저 죽고 싶지 않다는 강한 본능이었다. 이 모습은 가족사진을 품고 있었던 동료와 대비되는데, 그에게는 동료와 달리 지구로 돌아가야 할 이유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일단 생존에 성공했다. 이제 '중력'을 갖고, 지구로 돌아갈 차례이다.



그가 '생존'에서 '생명'의 단계로 넘어가는 기점은 꽤 명확하다. 중국 정거장에 도착한 후 우주복을 벗어던진 채 쉬는 모습은 너무 자명하게 자궁 속 태아를 떠오르게 한다. 생명력을 가진 하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럼 그에게 생명력을 준 것은 무엇일까. 힌트는 맷의 환상이 건네는 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알아. 여기에 영원히 남고 싶을 거야. 여기엔 상처 줄 사람도 없고. 계속 살아봐야 뭐 별 거 있겠어? 자식 잃은 슬픔만 한 게 어디 있다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너의 선택이야. 가기로 결심했으면 가야지. 두 발로 땅 딛고 당당하게 사는 거야.


라이언에겐 여전히 지구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본인이 무사히 돌아가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는 자기 자신이 있다. 항상 그곳에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본인'의 삶의 의지를 그는 마침내 발견한다. 세상을 떠난 딸에게서 삶의 이유를 찾던 그가, 마침내 본인의 내부에서 뻗어 나온 '그래비티'를 움켜쥔 것이다.




당신의 그래비티는 무엇인가요

삶의 의미를 외부에서 찾는 일은 흔하다. 가끔 '특정 정권 옹호하기', '조상 차례상 차리기'와 같이 2021년의 시대적 감수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집착하는 어르신을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이는 그분들이 본인의 존재 이유를 그곳에서 찾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삶의 이유는 '자식'이다. 이는 특히 우리의 어머니 세대, 혹은 그 윗세대 여자 어른에게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의 '엄마들'에게는 사회생활을 그만두고 가정에서 육아를 하는 것 외에 달리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다. 결혼 전에 얼마나 능력이 있었든 간에 상관없이 아이가 생기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그것이 당연한 분위기였고, 아이를 둔 채 일을 다니면 '비정한 엄마'라는 평을 받았다. 때문에 '엄마'들은 본인의 모든 시간을 자식을 위해 투자했고, 그들을 세상에 발 딛고 살게 만드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자식이 되었다.


이것이 비단 우리 엄마들만의 이야기일까. 지금의 엄마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종 늦게 출근을 하다 보면 학부모들이 유치원차에 탄 아이를 배웅하는 광경을 마주한다. 그 학부모들의 99.9%가 여전히 엄마, 할머니 등 여성이라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제자리걸음인 걸까.


그게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한 시람의 삶의 의미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있다는 것은 너무 위태롭게 들린다. 시간은 흐르고, 상황과 사람은 변하니 말이다.



모든 여성이 외부의 존재 외에,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내면의 무언가를 붙잡았으면 좋겠다. 삶의 의미를 내면에서 찾는 건 본인을 아껴야 가능하기에 실로 힘이 필요하고,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여성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생각할 수 있는 환경에 놓아주려는 세상의 노력 또한 필요하다.


때문에 여성에게 '엄마'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거세해버렸던 과거 (혹은 현재의) 세상에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자주 질문해야 한다. 당신의 그래비티는 무엇이냐고, 당신을 세상에 발 붙이고 있게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말이다.


모든 여성들이 세상이 정해놓은 천편일률적인 삶의 이유가 아닌, 본인만의 그래비티를 찾아가면 좋겠다. 마침내 스스로의 삶의 의지를 발견하고 지구로 귀환한 라이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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