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의 안나 D+3
새로운 동내에서의 첫날 아침. Ranelagh 역에서 가까운데 발음이 너무 어렵다. 오늘은 일정이 세 개나 있는 날이라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우선 오빠랑 동네 산책 겸 빵집에 가서 아침거리를 사 왔다. 파리에 온 지 무려 4일 만에 먹는 바게트였다. 숙소로 돌아와 커피를 내리는데, 캡슐 커피머신은 처음 써봐서 시행착오가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사용법을 알아내어 커피와 빵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11시에 Champ de Mars Arena에서 열리는 레슬링 경기를 보러 갔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안 나와서 딱히 기대되지는 않았지만 그냥 외국에서 올림픽 경기를 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기에 살짝 신났다. 아빠랑 둘이 좌석을 찾아 앉아 사진을 찍었다. 사실 룰도 모르고 선수들도 모르지만 경기장 내 분위기는 좋았다. 올림픽 경기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세 개의 원형 경기장이 붙어있고 동시 다발적으로 시합이 시작됐다. 6분 동안 점수를 내는 방식이었고, 체급별로 나뉘어 볼 맛이 났다. 아빠와 나는 왜인지 모르게 동양팀을 응원했다. 경기는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나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가야 해서 11시 30분에 나왔다.
점심은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았던 일식당에서 먹었고, 오후 투어 전 시간이 살짝 남아 Palais-Royal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나도 처음 가본 곳이라 신났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사진도 예쁘게 잘 나왔다. 아빠는 아주 높은기둥까지 올라가 포즈를 취했는데, 신나 하는 모습을 보니 귀여웠다. 날이 더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으나 젤라토 가게를 찾지 못했다.
2시부터 루브르박물관 투어를 했다. 가이드 분의 억양이나 목소리 톤이 듣기 좋은 편은 아니라 아쉬웠지만, 내용은 알찼다. 루브르에는 작품이 무려 65만 개가 있다고 한다.. 다 보려면 적어도 5일 내내 하루종일 봐야 한단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핵심적인 작품만 감상했다. 사람이 진짜 많았다. 이 많은 작품들은 어떻게 관리하는지도 궁금했다. 투어는 약 세 시간 코스였는데 역시나 2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다리도 아프고 집중력도 떨어져 힘들었다.
투어가 끝난 뒤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헤어졌고, 준영과 나는 숙소 옆 마트에서 간단히 저녁거리를 샀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 된 준영은 잠깐 눈을 붙이고 나는 빨래를 돌렸다. 저녁 먹으면서 로제 와인을 반 병 정도 마셨는데 살짝 취해서 벽 모서리에 얼굴을 부딪히기도 했다.
저녁엔 야경 투어가 있어서 자고 있는 준영을 깨워 출발했는데 원래 타려던 RER을 놓쳐서 9호선을 탔다가 10호선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미팅 시간에 늦었다. 미리 가이드께 연락을 드리니 오늘은 우리 가족 한 팀밖에 없어서 괜찮다는 답을 받았지만 영 마음이 찝찝했다. 심지어 10호선은 순환선이라 목적지에 가려면 살짝 돌아가야 했기에 조금 늦게 나온 것을 후회했다. 몸도 너무 피곤하고 살짝 짜증이 난 상태였지만 준영에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준영도 여전히 비몽사몽이었고 우리는 지하철에 내려 Le Départ Saint-Michel 카페 앞으로 달렸다. 야경투어 가이드님은 남자분이셨는데 파리 곳곳을 영화와 함께 설명해 주셔서 더 재미있었다.
투어는 11시쯤 끝이 났고, 우리는 에펠탑 앞에서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12시 55분부터 1시까지 딱 5분 동안 화이트 에펠탑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안 자는 건 무리였다. 난 녹초가 되어 씻고 바로 잤고 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한 준영은 동네 버거집에서 햄버거를 포장해 와 먹었다. 아빠는 숙소에서 씻고 맥주를 마시고 잤다고 한다. 우리 중에 체력이 가장 좋은 것은 영호임에 틀림없다. 파리여행의 중반을 향해 가고 있지만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지는 않았다. 하루가 어마무시하게 길다는 느낌만 계속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