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에 찌들어 살던 어느 해 설날 명절 연휴에 나는 오타루로 여행을 갔다. 설날이 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급하게 비행기표와 숙소만 예약하고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눈을 허리 높이보다 더 높게 쌓아둔 길들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낮에 봐 두었던 작고 소박한 전형적인 일본식 선술집으로 갔다.
약간의 김이 서린 유리창을 통해 은은하게 불빛이 흘러나왔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가족인 것처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 따뜻해서 선뜻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사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혼자 어딘가에 들어가는 것을 잘하지 못했다. 특히 식당에 혼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두세 번 정도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 테이블 안에서 하얀 옷을 입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던 온화한 인상의 아저씨가 나를 보고 웃으며 뭐라 뭐라 말했다. 나는 멀뚱한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를 펴서 혼자라는 표현을 했다. 아저씨는 손으로 바 테이블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나를 안내했다. 바 테이블에 있던 네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보았고, 등 뒤로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지며 일순간 정지한 듯 실내가 조용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내가 이상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바텐더인지 요리사인지 모르지만 주인으로 보이는 그 아저씨가 바 테이블 안에서 메뉴판을 내밀며 뭐라 뭐라 말하면서 정적은 깨졌다. 나도 멎었던 숨을 다시 내쉬며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아이쿠...'
메뉴판을 펼쳐보고 나도 모르게 나직이 탄식이 나왔다. 온통 일본어였다. 오타루는 관광지니까 영어도 같이 표기된 메뉴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긴 아직 그런 메뉴판이 준비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나마 사진이 있어서 대충은 이해가 되었다. 메뉴판의 사진을 훑어보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따뜻한 보리차를 내밀며 뭐라 뭐라 말을 걸었다. 자꾸 일본어로 뭐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그는 내가 일본인인 줄 알았나 보다. 그런 오해를 하도 많이 받아서 이제는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내가 짧게 영어로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그는 뭔가를 알아낸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어색하게 영어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옆에 앉은 손님들에게 빠르게 뭐라 뭐라 말했다. 그러자 그들이 일제히 일본인 특유의 그 알았다는 표정으로 호응을 했다.
아무래도 관광객 같아 보이지 않는 여자가 혼자 들어와서 말없이 앉은 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았다. 그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얼마 만에 짓는 미소인지 나도 내가 어색했다. 주인아저씨의 도움으로 사진을 보며 덮밥과 작은 우동과 따뜻한 정종이 함께 제공되는 저녁 세트 메뉴를 주문했다.
주문을 하고 바에 진열된 정종들이 신기해 찬찬히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제사 때나 쓰던 큰 병의 정종들이 아주 다양한 상표를 달고 진열되어 있었다. 잔 술로 파는 모양으로 병에는 각기 다른 양의 술이 남아 있었다. 옆에 앉은 무리의 사람들은 주인아저씨와 친구인 듯 계속 대화를 하며 유쾌하게 술을 마셨다. 잔이 빈 사람이 큰 병의 정종들 중에 하나를 고르면 주인아저씨가 한 잔을 따라서 건네주고는 다시 큰 병을 진열장에 두었다. 그들은 골라 마시는 재미에 술을 마시는 듯 술을 고를 때 한참을 대화하고 신중하게 고르는 듯했다.
정종 병들을 풍경 감상하듯 보는 내가 신기했는지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 중에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이 내게 뭐라 말을 했다. 중간에 주인아저씨가 짧은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다. 그들도 영어가 서툴렀고 나도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단어만 말해도 의미가 전달되었다. 여러 번의 짧은 문장으로 통역을 해준 주인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정종을 좋아하느냐, 어떤 정종을 좋아하느냐, 좋아하면 내가 한 잔 사 줘도 되겠느냐' 같은 의미로 내게 해석되었다. 나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을 했다. 그러나 그들도 사양하지 말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들은 열띤 토론이라도 하는 듯이 앞다투어 이야기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주인아저씨는 높은 곳에 진열된 정종병을 내려서 작은 잔에 조금 따르고 또 신중하게 다른 병도 꺼내서 조금 따랐다. 그리고 내게 작은 잔에 담긴 정종 두 잔을 내밀며 마셔보라고 했다. 와인을 시음하듯 정종도 시음을 하는지 시음용 잔인 듯했다. 그리고는 어느 것이 더 맛있냐며 물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 주인아저씨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병을 들어 보이며 뭐라 뭐라 떠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탄식을 하듯 일본인 특유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그들끼리 내기를 한 모양인 듯했다. 주인아저씨는 내가 선택한 정종을 맥주잔보다는 작은 유리잔에 7부 정도로 따라서 내게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프레젠또!"
나는 감격한 표정으로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 감사하다며 잔을 들고 그들과 건배를 했다. 그들이 한국어로 '간빠이'를 하자며 단어를 물었다. 그들과 '간빠이'를 한번 외치고 또 '건배'를 외치며 그들이 선물한 정종을 마셨다. 내 옆에 앉은 조용한 아저씨가 마른 생선이 담긴 작은 접시를 내게 내밀며 먹어보라고 했다. 그들도 안주로 즐기는 생선이라고 했다. 마른 노가리 같기도 했고 말린 굴비 같기도 한 그 생선은 고소하니 담백했다.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내가 하나만 먹고 고맙다며 그쪽으로 다시 접시를 밀었더니 그는 하나 더 먹으라는 제스처를 하며 또 권했다. 나는 할 수 없이 하나 더 집어 들고는 다시 그에게 접시를 돌려주었다. 그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나도 마른 생선을 씹으며 어색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밝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그들과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재미있었다.
내가 주문한 식사가 나오자 그들은 내가 주문한 음식이 궁금했는지 일제히 나의 음식을 보았다. 그러고는 주인아저씨에게 목소리를 높여 뭐라 뭐라 말했다. 손님들은 저런 음식도 있었냐, 몰랐다는 반응이었고 주인아저씨는 음식에 대해 설명하는 듯했다. 내가 주문한 작은 도쿠리에 따뜻한 정종이 나오자 나도 그들에게 권했지만 그들은 한사코 됐다며, 따뜻한 정종은 안 마신다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양이 얼마 되지 않으니 혼자 마시라고 주인아저씨가 상황을 정리하며 나의 작은 정종 잔에 따뜻한 정종을 따라 주었다.
그들은 내가 식사할 수 있도록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내게서 관심을 꺼 주었다. 그리고 다시 정종을 골라가며 마시고 유쾌하게 웃고 떠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큰하고 기분 좋게 취한 그들이 잊지 않고 나에게 웃으며 작별인사를 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좁은 문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이 한국의 여느 직장인들 같아 보였다.
그들이 나가고 난 뒤에 뒤이어 테이블에 앉아있던 몇몇 사람들도 가게를 나서고 실내가 조용해졌다. 나는 남은 정종을 홀짝거렸다. 주인아저씨는 내 도쿠리의 정종이 식지 않았는지 가끔 만져보며 온도를 체크하고 조금 식었다 싶으면 다시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김서린 격자창 너머로 어둠이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짙어졌다 엹어졌다하며 움직이는 듯했다. 가끔 외투며 목도리로 꽁꽁 싸맨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그 밤의 풍경과 느낌은 참 따뜻했다. 따뜻한 정종을 마시며 그런 풍경을 보고 있으니 피곤과 스트레스로 쩔어있던 심신이 온천에 몸을 담근 듯이 풀어졌다. 마음마저도 노곤 노곤하게 녹아져 내려 가볍고 포근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그 밤을 따뜻하게 기억하는 것은 따뜻한 정종 때문만이 아니라 처음 보는 타국의 사람들에게서 한국인들에게서나 느낄법한 '정(情)'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에게도 '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긴 세계 곳곳에는 우리가 '친절함'으로 표현하는 '정'이란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느낌은 한국인의 깊은 정(情)과는 조금 다를지라도.......
그날 밤 그들의 '정'이 더 따스하게 느껴진 것은 내가 아주 오랜만에 편하게 웃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온전히 나를 위해.
혼자 있다보니 웃을 일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
그날 밤의 따뜻했던 정종 한 잔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