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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나 Nov 16. 2021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이 그리울 때


어떻게 한 번도 보지 못한 세상이 그리울 수가 있을까요?


영화 '모토사이클 다이어리'에서 주인공인 에르네스토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 적었던 말이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마추픽추에서 쓴 편지일 것이다. 몽환적이면서 애틋한 뭔가가 떠오르는 말이다. 


한동안 체게바라에 심취해서 그의 평전을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던 적이 있다. 빨간표지에 베래모를 쓴 체 게바라의 초상이 검게 인쇄된 두껍지만 손에 잡기 편한 크기의 책이었다. 우연찮게도 내가 체 게바라에 심취해있던 그 시기에 나는 남미의 과테말라에 가게 되었다. 난 그 책을 이미 다 읽었음에도 과테말라로 가는 짐가방에 넣었다. 남미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책을 나중에 과테말라에 온 동생이 다른 한국인에게 빌려줬다가 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그들끼리 돌려보다가 결국 누군가가 돌려주지 않아서 잃어버리게 되었다. 나의 감수성 넘치는 메모들이 빽빽했던 그 책을... 다른 이들에게 빌려준 동생에게 크게 화를 내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처음 남미로 떠난 여행은 내가 전혀 알지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 여행이었다. 외면은 그저 한 삼개월 친구에게 여행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내면은 어쩌면 그때 이미 다른 꿈을 꾸고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과테말라에서의 생활은 여유 그 자체였다. 비록 마음까지 여유로울수는 없었지만 한국에서는 가져볼 수 없었던 시간적 여유와 해야할 것이 없는 몸이 편한 생활이 이어졌다. 특히 안티구아라는 옛 수도에서 사는 삶은 내가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서의 천국같은 삶이었다. 


오전 시간은 학교라고 부르는 어학원에서 1:1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문화활동을 하거나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어울려 놀았다.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친구가 된 사람들과 스페인어로 떠들기도 하면서 매일을 베짱이처럼 살았다. 하루 중 어느때나 중앙 공원에 가서 앉아 있으면 아는 사람을 만나 놀거나, 모르는 사람도 친구가 되어 함께 놀았다. 유럽 등지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본인이나 한국인도 많았다. 나는 되도록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스페인어 실력 향상을 위해서라고 명분을 세웠지만 사실은 불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산책할겸 길을 걸어다니다 안티구아의 유일한 극장에 체 게바라 영화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모토사이클 다이어리'였다. 영화를 보고 이해할 수 있을만큼 스페인어를 잘 하지 못했지만 너무 보고싶었다. 바로 보고싶었지만 겁이 났다. 난 한국에서조차 한번도 영화관에 혼자 가본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만 확인하고 돌아와서 이틀동안 계속 고민하고 갈등하다 사흘째 되는 날 결국 혼자 영화관으로 갔다. 


그리 크지 않은 영화관에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드문 드문 앉아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정석이 없는 극장이라 중간쯤되는 위치의 통로쪽 자리에 앉았다. 너무 구석도 싫었고 중앙도 싫었는데 딱 적당한 자리가 있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영화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실내는 어두컴컴해서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그 시기에 내가 우상으로 생각했던 체 게바라에 대한 영화를 처음보았다. 모든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충 이해 할 수 있었다. 아니 알 것만 같았다. 너무나 다행인 것은 그 영화는 말보다는 행동과 풍경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남미 곳곳의 풍경들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감사하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꼭 영화속의 에르네스토가 갔던 길을 나도 가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날부터 한번도 가 본적이 없지만, 벌써 그리워지기 시작한 그곳들을 언젠가는 나도 가볼 것이라는 꿈과 목표가 생겼다. 


이것이 내가 남미 배낭여행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로 나는 마추픽추를 목적지로 잡고 처음으로 혼자하는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이후로 남미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리웠던 그곳들을 조금씩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에르네스토가 밟아갔던 그 루트대로는 아니지만 나름 그가 밟은 땅에 나도 내 발자국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남미 배낭여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 본적은 없지만 그리운, 미지의 낯선 곳들을 언제나 그리워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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